이 글은 2023년 WRM에서 진행된 소모임〈책이 사는 세계로부터〉팀의 동명의 전시에 비치되었던 이열음의 도서관 일기 전문이다.
전시 때 비치되었던 도서관 일기(디자인 : 정지영 님) 디자인 아이디어를 토대로 편집, 가공하였다.

기억에서 항해까지

책과 도서관의 기억

지식의 물리적 인프라인 도서관은 문화적, 인식론적 질서를 세우려는 야심을 나타내는 지표인 동시에 새로운 질서, 논리, 배치를 실험하는 가능성의 영역이다. 이때 ‘환상’은 완벽한 지식 체계를 구축하려는 열망으로도, 혹은 탈권위적인 배움을 추구하며 기존의 질서를 바꾸려는 시도로도 해석할 수 있다.

『도서관 환상들』, 아나소피 스프링어, 에티엔 튀르팽 (김이재 역, 만일 2021)

도서관에 대한 처음의 기억은 분명하지 않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기 보다는 차라리 무서워하는 어린이에 가까웠는데 그런 이유로 도서관에 대한 나의 첫 만남은 여타의 책 덕후들이 말하는 황홀감은커녕 기억에조차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다.

책은 나에겐 늘 장벽과 같았다. 도서관은 친밀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어려움의 장소, 대출과 동시에 부과되는 어깨를 짓누르는 과업, 읽지 못한 책을 반납하러 갈 때면 그 책의 무게만큼이나 모종의 죄책감과 함께, 때로는 소정의 연체료와 함께 그 죄책감을 갚고 나오는, 그런 장소였고 사실 지금도 그렇다. 마치 모래주머니를 달고 체력 훈련을 하는 양, 읽지도 않을 책들을 가방에 이고 도서관 왕복 운동만을 하는 날이 비일비재했다. 그렇다고 건강해진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왜인지 도서관에 부지런히는 다녔다. 흐릿한 첫인상과 그토록 여러 차례 다녀 어느 날이 어느 날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도서관에서 보낸 수많은 날 가운데 꽤 운명적인 만남 하나 정도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바로, 처음 보르헤스를 펼쳐 들던 순간이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 속에 이미지가 겹겹이 겹치고 기억에 서 후보정을 거쳐 마법처럼 각인됐다. 다른 어떤 곳도 아닌 도서관이라는 것, 펼쳐 든 순간 전혀 다른 세계의 문을 열었다는 감각, 그 문을 연 이후로 내게 책은, 그리고 도서관은 이전과는 영원히 다른 것이 되었다.

책이란 무엇인가 ― 책의 관념성

책 수집가의 열정은 여행자의 열정과 비슷하다. 모든 도서관은 여행이며, 모든 책은 유효 기간이 없는 여권이다.(중략) 독서는 마치 나침반처럼 그에게 미지의 길을 열어주었다.

『갈대 속의 영원』, 이레네 바예호 (이경민 역, 반비 2023)

이탈로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이란 책에는 잔 데이 브루기라는 이름 깨나 날리는 도둑이 등장한다. 이 도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책에 푹 빠져버려 도둑질을 그만두고 숨어서 책을 읽기 시작하는 인물이다. 모르는 곳에 처박혀 계속 책을 읽던 그는 심지어 직업적(?) 회의을 느끼기에 이른다. 그 무렵, 잔 데이 브루기의 부하들은 생계(?)를 제쳐두고 책만 읽는 두목의 작태를 보다 못해 그가 읽던 책의 결말부를 찢어가며 다시 생업(?)에 임하자고 협박하기까지 하는데, 이후의 잔 데이 브루기의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은 『나무 위의 남작』을 읽으시면 되겠다. 참고로, 2023년 올해는 이탈로 칼비노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런 류의, 소위 책벌레들을 볼 때면 신기하기만 할 뿐이다. 재미를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재미를 추구하며 책을 읽는 부류의 사람만큼은 전혀 될 수 없다는 것을 매우 이른 나이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조차도 재밌게 본 책들이 있지만 ― 위의 『나무 위의 남작』도 재밌게 본 책 중 하나이긴 하다 ― 기본적으로 내게 읽기 과정은 대체로 지난하고 과장을 좀 보태자면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을 보면 그런 고통에도 계속해서 읽도록 추동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셈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삶에서 글쓰기를 떠올려 보면 나는 그의 글쓰기가 생존을 위한 글쓰기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낮에는 일을 하고 새벽에는 글을 썼다. 그렇게 새벽 동안 쓴 글의 양은 하도 방대하여 소설 뿐 아니라 일기, 편지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그 글들은 마치 그가 남긴 고통 그 자체 같다. 유형지 같은 삶, 언제든 선고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알 수 없는 죄의식 등으로 점철된, 그를 둘러싼 세계 속에서 그나마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던 일이란 글쓰기가 아니었을까, 그것도 해소라기보다는 하릴없이 써 내려간 분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서투른 짐작을 해 본다. 참고로, 2024년인 내년은 프란츠 카프카 사망 100주기가 되겠다. 100주기를 기념한 많은 출판사들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카프카에 빗대어 말하면 너무 거창하고, 나의 독서는 보잘것없지만, 내게 읽는 행위도 생존을 위한 행위에 가까웠다. 카프카의 작품을 읽을 때면, (그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에 연민이 들어 목 놓아 울었고, 니체를 읽을 때면, 노예 상태인 스스로에 화도 났다. 때로는 나와 비슷한 ― 비루한 ― 정신을 이런저런 문학 속에서 발견하며 나만이 이런 게 아니란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하기도 했다. 나는 책 속에서 수많은 ‘나’들을 발견했고, 그렇게 부지해 오고 있었다. 이때까 지의 책은 나에게 있어 관념성 그 자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글자의 내용을 읽으면 글자의 형태는 잘 보이지 않는데, 글자나 문단의 형태를 발견하게 된 것은 내 책의 역사 중 한참 최근의 일이다.

책이란 무엇인가 ― 책의 물성, 그리고 물질성

종이, 잉크, 타이포그래피부터 포맷과 제본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성의 측면들은 다양한 구조적 요소들(페이지네이션, 표지, 마지막 장, 여백 등)을 넘어 심지어 유통 양식까지도 책의 가치에 기여한다.

『출판선언문 출판하기』, 미할리스 피힐러 (임경용 역, 미디어버스 2019)

얼마 전, 낯선 방식의 문단 정렬이 된 책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기존 책의 본문이 웬만하면 ― 사실 시를 제외한 거의 전부 ― 양끝 정렬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본문의 오른편이 들쭉날쭉한 형태의 왼쪽 정렬은 생경하기만 했다. 왜 기존의 안정감을 포기하고 이런 파격적인 선택을 했는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주변의 디자인 종사자분들에게 물으니 (정확한 의도와 문장을 옮겨놓을 수는 없지만) 서체에서 글자와 글자 간격 사이가 양끝 정렬인 경우 균일하지 않고 오히려 왼쪽 정렬이 균일하다고들 하는 것이었다. 텍스트의 형태보다 텍스트의 내용에만 집중하던 사람으로서는 전혀 생각지 못한 이유였다.

문단의 정렬을 예로 들었지만, 행갈이를 하는 시점, 주석을 넣는 방식, 책의 판형, 종이의 질감, 서체가 주는 느낌, 그리고 가장 먼저 책을 만나게 되는 표지가 주는 인상까지, 물질적이고 시각적 의도들이 책 곳곳에 숨어 있다. 독자는 글을 쓴 작가는 물론이고, 어떤 측면에선 실제 책 제작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의 감상과 의도의 일부 산물을 책의 물성 자체로부터 제공받고 있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출판선언문 출판하기』에서 발췌한 내용과 같이 유통 양식까지도 책의 가치에 기여한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독립 출판물을 만들고 유통할 때를 떠올렸다. 당시 출판했던 독립 출판물의 경우, 출판물 기획자로서 출판물의 주제적 가치와 부합하는 곳에 유통하고 싶어 입고할 서점들을 고르고 골랐다. 이를테면, 친환경 용지를 사용하여 만들었던 만큼, 환경에 관심이 있는 서점에 놓였으면 했다. 또한, 될 수 있으면 택배의 형태가 아닌 방문 입고의 방법을 선택하고 싶었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해 본다면 어느 서점에 출판물을 입고시킬 것인가,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부터 서점에 이르러서는 어떤 식으로 진열하고 배치해 주어 출판물의 분위기를 구현하여 줄 것인가, 까지도 모든 물성의 과정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나중에는 수많은 재고로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입고 문의를 수도 없이 했으나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선택은 선택권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이 수많은 재고 중 하나와 만나보고 싶은 분이 있다면 김만복의 『무명한 이야기』를 검색해 보기 바란다.

이토록 책은 만듦새부터 유통을 거쳐 진열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공조, 협력, 속에 나오는 다면적 구성품이며 책의 물성이란 사실 낭만화된 감성 그 이상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다.

책과 책꽂이가 진화해 온 이야기들은 실제로 불가분하며, 둘 다 테크놀로지 진화의 예다. 책과 책이 놓이는 가구의 모양을 규정해 온 것은 문학적 요인들만이 아니라 테크놀로지적 요인들 ― 재료, 기능, 경제, 용도와 관련된 요인들 ― 이다. 그러나 테크놀로지는 사회적, 문화적 환경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테크놀로지는 그 환경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또 그 환경에 영향을 준다.

『책이 사는 세계』, 헨리 페트로스키 (정영목 역, 서해문집 2021)

『책이 사는 세계』를 읽기 전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수도원 도서관의 이미지는 내겐 지금의 도서관과 크게 다르게 상상되지 않았었다. 다만, 배경이 조금 어두침침하고 책장이 좀 엔틱하고 고풍스런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고…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순간 모든 상상은 파괴되었다. 책등의 존재 자체가 근 몇 세기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이런 책들은 때로는 책궤에, 때로는 독서대 같은 책상에, 때로는 사슬에 묶여 책등이 안쪽을 향하여 꽂혀 있다는 이야기를 읽었고, 이는 몇 번을 읽어도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으며, 그림이라는 부가 자료를 보아도 너무나 생소한 광경이었다.

책의 형태와 그 형태의 변화에 따른 하부 구조의 변화 과정을 보고 있자니 마치 텍스트의 내용과 형태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앞서 텍스트의 내용으로 텍스트의 형태가 보이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책장이라는 하부 구조는 책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실은 책과 함께 그 형태와 모양을 달리해 오며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말한 물성과는 또 다른 의미의 물질성으로 우리 세계에 중력이 있다는 것, 관념의 발달이 기술 세계와 끊임없이 조응해 왔다는 것을 『책이 사는 세계』를 읽으며 내내 실감했다.

이렇게 책의 내용이라는 관념이 자리 잡도록 하는 물리적 조건이 만들어지고, 또 그 물리적 조건이 자리 잡으면서 그에 따른 새로운 관념들이 순환하는 식으로, 책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아온 것이다.

해체되는 책, 붕괴하는 도서관 ― 책의 신성화와 세속화 사이에서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책보다 출판이라는 용어가 더 나은데, 이 용어는 디지털 파일이나 하이브리드한 미디어, 우리가 아직 상상하지 못한 형식까지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출판선언문 출판하기』, 미할리스 피힐러 (임경용 역, 미디어버스 2019)

책과 도서관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물리적 조건과 관념이 순환하며, 기술과 맞닿으며 그 형태와 방식이 변화하고 있다. 이제는 책등과 뒤표지가 사라진 전자책이 어느 정도 책의 지분을 점유하게 되었으며, 수기로 기록하던 도서 대출 기록은 점차 바코드로 대출 이력을 남기는 방식으로, 20년 전에는 차에 직접 책들을 싣고 이동하며 대출을 하던 이동도서관은 인터넷을 통해 관내 상호 대차 서비스를 제공하는 식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가속화하는 기술 속에 책과 도서관의 미래는 또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지 짐작도 할 수 없을 지경이다. 책의 종말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인용한 바와 같이 이제 책은 단지 〈책〉만을 일컫지 않는다. 물질성의 측면에서부터 이미 책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그러나 책이 해체되어 가는 것은 물질성의 측면이 전부는 아니다. 완성성의 측면에서도, 또 권위의 이중적 분화 과정이라는 차원에서 도 책은 해체의 과정을 거쳐 가는 것처럼 보인다.

완성성을 먼저 짚어 보자면, 책을 만드는 과정을 살피는 것으로 충분하다. 독자로서 책을 마주할 때에는 온전한, 하나의 완성품 ― 조금 더 신성모독적으로 말하자면 기성품 ― 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러나 책을 만드는 과정, 그리고 만들어진 이후의 과정까지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책이 과연 완성된 무엇으로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게 된다. 번역과 편집을 거치며 조금이라도 원문이 다른 형태로 탈바꿈하게 되는 과정은 차치하고라도, 눈 밝은 독자에게 발견되는 오탈자와 시대에 따른 언어 사용의 변화, 국립국어원에 의해 조금씩 바뀌는 표준어의 기준만 보아도 그렇다. 출판이란 어쩌면 제논의 역설처럼 무한정으로 완성에 다가가려 하지만 결코 완성에는 닿을 수 없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이런 생각이 든 이후에는 어떤 책을 사야지, 하고 장바구니 속에 넣어 두었다가도 오탈자 같은 것이 수정된 다음 쇄에 사야지, 아니 〈더〉 완성된 쇄, 아니 그보다 〈더〉 완성에 가까운 개정판이 나오면 사야겠어, 하고 미루고 미루게 되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대부분은 완성품은커녕 저작권 만료에 의한 절판이란 절망적인 선고를 통해 책은 구경도 할 수 없게 되는 비극을 맞이한다.

책이란 모름지기 지식의 보고요, 성현의 지혜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과거에는 글과 책이란 매체가 소수 엘리트 집단의 전유물이었던 이유로, 귀한 것이란 인식 역시 한몫했겠지만, 오랜 세월 살아남은 이념과 사상, 연구가 지니는 권위와 위엄은 그 자체로 세계를 지배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느꼈던 책에 대한 중압감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책에 대한 이런 이미지는 지금도 어느 정도 적용되는 듯하다. 그러나 〈책 읽기〉 자체보다도 책 읽기를 위한 책 읽기를 위한 책 읽기를 위한 고전팔이 자기계발서의 난무, 책이 생산하는 가치보다 팔릴 책에 집중한 출판이 가져올 가치 전도 등의 양태를 보고 있자면 정신이 조금 아득해진다. 사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아득해진다. 그렇다고 고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고 오류가 없다는 말이나 지금은 좋은 책이 나오지 않는다는 따위의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책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기에 가지고 있는 권위와 그를 통해 〈작가〉란 사람들이 호도하는 주제가 어딘가 괴이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버킷리스트로써의 출판하기 역시 일부는 이런 권위 획득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요즘 인스타그램의 소개 글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책의 저자요, 작가들인데, 여기서 〈작가 되기〉의 욕망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글쓰기 형 블로그 서비스인 브런치스토리만 봐도 〈작가〉라는 〈자격〉이 주어지는 의례가 존재한다. 여기엔 이상한 역설이 존재하는데, 책은 우리의 기억 속에 여전히 신성한 무언가라는 것, 책이 권위 있고 신뢰할 만한 매체라는 것, 그리고 출판을 통해 권위를 획득하려 하지만 이런 상황으로 인해 책이라는 매체는 전반적으로 세속화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바야흐로 책의 의미는 해체되고 도서관은 붕괴되고 있는 시대다. 직접적 의미에서도, 은유적 의미에서도. 점차로 매체는 다각화하고 책의 종말은 이미 예견되어 왔던 데다 실질적 도서관 예산도 줄고 있다. 이런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험난하고 암담한 책의 미래라는 지옥에 빠진 것처럼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시대 속에 책과 도서관은 진정 사라지고 말 것인가.

다시 책으로의 항해, 그리고 영원할 도서관

항해는 ‘해석’이 이루어지는 능동적인 과정이다. (중략)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만이 아니라 본래 글의 의도와는 완전히 독립적인 방식으로 텍스트를 읽게 되는 것이다. 무엇과 무엇을 연결시키며, 어떤 생각을 다른 생각의 앞 또는 뒤에 둘지를 결정하는 데 독자의 자유가 책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이 보장된다.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책의 종말』, 배식한 (책세상 2021)

웹에서 <a> 태그하이퍼링크를 가능하게 하는 태그이다. 현재 단행본 전자책에서는 <a> 태그를 주로 주석 달기*에 사용하고 있다. 본문에서의 숫자 또는 기호로 된 주석을 주석의 내용과 서로 링크로 연결해 원문과 주석의 내용 사이에서 들고 나기 쉽게 하기 위함이다. 기존 종이책에서도 원글과 주석은 본래의 맥락과 부가적인 설명이라는 위계를, 전자책에서도 돌아올 곳의 존재를 상정하며 원글로의 집중을 유도한다. 이는 우리가 마주해 온 책이란 매체가 시대를 거듭하며 발전시켜 온 논리적 정합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a> 태그가 단지 본문과 주석을 연결하는 용도로만 쓰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태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사실 현재의 단행본 전자책은 웹의 의의를 십분 발휘한다기보다 html 언어를 차용한, 종이책의 부가적 산물로 이해되는 경향이 크다.

<a> 태그는 anchor(닻)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누구라도 수 시간, 웹에서 링크의 링크를 따라가며, 나중에는 시작이 무엇이었는지도 잊을 정도로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며 보고 듣고 읽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 하이퍼링크는 자칫 맥락을 해치고 집중력을 흩뜨리는 존재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역으로 처음과 끝도 돌아올 곳도 나아갈 곳도 정해져 있지 않은, 연결됨으로써 배회하고 방황함으로 인해 사용자 스스로가 구성하는 날것의 직관, 동시에 원 텍스트로부터 발현하고 혹은 원 텍스트에 틈입의 여지를 도사리게 하며 논리적 정합성의 위계를 벗어난 사고하기의 자유를 가져다줄 가능성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에도 몇 차례 인용한 『도서관 환상들』이란 책에선 “좋은 이웃 법칙”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아비 바르부르크가 말한 이 법칙은, 직선적인 공간이 아닌 타원형 공간에서 듀이의 분류법이나 기존 위계로 배열하지 않고, 서로 상이한 영역의 책들을 이웃하게 배치함으로써 발생할 새로운 생각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때아닌 <a> 태그를 발견한다. 다른 계열이라 여겨졌던 것들의 이웃함, 연결 고리로, 마주한 항목들이 재맥락화되면서 기존의 논리적 흐름에서 벗어난 새로운 흐름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 그것이 곧 <a> 태그가 열어줄 새로운 항해의 길이 아닐까.

책이란 물리적 사물 세계에 있는 하나의 물리적 사물입니다. 그것은 죽은 상징들의 묶음입니다. 그리하여 적절한 독자가그 책을 펼치노라면, 언어 ― 또는 오히려 언어 너머에 있는 시, 왜냐하면 언어 자체는 단순한 상징이 불과하니까요 ― 는 살아나게 되고, 우리는 언어의 부활을 봅니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박거용 역, 르네상스 2008)

불경스러운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책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책을 좋아하거나 많이 읽는 사람들이 무조건 좋아 보이던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알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지나며, 좋아하는 것과 아는 것과 삶을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를 읽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책을 읽은 사람 모두를 책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주진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내겐 확연해 보인다. 결국 책이란 완전무결한 것도 절대적 신성성을 보증하는 매개도 아니며, 말마따나 〈죽은 상징들의 묶음〉이다. 이 상징에 실려 있는 의미에 생을 불어넣는 것은, 책에 이끌려 변화되는 인간의 모양새가 아닌, 읽는 사람 자신인 셈이다.

아마도 우리 시대에 책의 의미는 몇 번이고 와해되고 다시 정립되고를 반복할 것이다. 권위는 해체되고 세속성을 띤 무언가가 책이란 형태로 출현하고, 우리가 가야 한다고 믿었던 길을 방해하거나 또는 새로운 매체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곧 책의 종말이라고 믿지 않는다. 형태와 의미를 달리하는 중에, 무너지는 권위 체계 속에, 책이라 불릴 무언가가 새로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책이라 불렸던 것들의 잔상이 아니라, 읽는 이가 향해 나아가는 방향, 그러한 방향으로의 의지, 존재를 뒤흔들고 삶의 변화를 추동하도록 하는 우연한 마주침이 아닐까.

어찌 보면 나아가는 곳이 책이요, 도서관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책과 도서관의 모습이란, 곧 우리의 새로 쓴 기억이요, 연대이고, 살아가는 방식으로써의 거대한 도서관일 세계 그 자체를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보르헤스로 시작한 이 글을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중 일부를 인용하며 마치고 싶다.

〈도서관〉은 영원히 지속되리라. 불을 밝히고, 고독하고, 무한하고, 부동적이고, 고귀한 책들로 무장하고, 쓸모없고, 부식하지 않고, 비밀스러운 모습으로 말이다.

– 「바벨의 도서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역, 민음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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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의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