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포함한 모든 인칭 대명사와 이니셜은 특정 인물, 젠더를 지칭하지 않습니다. 또한,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사건, 상표, 지명, 직업, 직업에 대한 묘사 등은 모두 실제와 관계없는 허구임을 명시합니다.

모스코 뮬

구부정한 허리, 안으로 둥글게 말려 움츠러든 어깨, 사진 찍을 때가 아니면 늘 약간 풀려 있는 멍한 눈과 살짝 벌어진 입술, 그럭저럭 평균의 차림새, 습기로 부스스해진 머리칼, 그의 자세와 태도만으로도 그가 꽤 순응적이고 또 어느 정도 무해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삶이란 그에게는 일종의 연기와 같아서 사건들에 대해, 종종 사람들로부터 돌출되는 혹독한 언행의 진위조차 그는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이 없었고, 그는 그저 그렇게 보이는 자신을 각각의 장소에서 충실하게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착한 자녀이자 가족의 일원이었고, 친절한 친구, 예의 바르고 공손한 사람, 마치 보통 인간의 표본이 있다면, 바로 그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각각의 장면들에 더없이 잘 맞는 인물로, 사회가 찍어낸 듯한 각 역할의 매뉴얼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자신에게 이입하기는 어려웠다. 역할을 완벽에 가깝게 보일 만큼 수행할 수 있을지언정, 자신이 되고자 할 때에는 어색함이 그를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삶이, 진정 그가 원하던 것인지,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삶의 문턱에서 그런 의혹이 들던 순간, 그는 불안해졌고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그는 자신에게 영혼 같은 것은 애초에 있지를 않아, 존재 자체만으로는 어떤 에너지도 발생시키지 않는, 그저 정지한 물체와 같다고 스스로를 생각했다. 표본의 삶이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삶인지도 몰랐다. 그는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거슬릴 것 없는 존재이자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며 충만한 삶을 살아내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공허를 느꼈다.

그는 좀처럼 취하는 만큼 술을 마시는 법이 없었으나 그날은 좀 달랐다. 어느덧 3차, 밤은 새벽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떠밀려 들어간 한 술집, 소주 혹은 맥주나 겨우 마시던 그의 무리가 요상하게도 그날만큼은 분위기가 좀 다른 곳에 가보자며 이끌려 갔던 곳. 평범한 동네, 그 위에 덧입혀진 새로운 세계의 문턱 같다고, 그는 발을 들일 때부터 느꼈다. 취기 탓이겠지, 생각하면서도 그는 언제 그가 칵테일 같은 것을 마셔보겠느냐며,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맛있는 칵테일 추천을 부탁했다.

한 모금, 생강 향이 입안에 달콤하고 상큼하게 퍼졌다. 그제야 그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니 낡은 듯 촌스럽지 않은 소품, 종잡을 수 없는 것들이 혼합되어 있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분위기, 어딘지 고집스럽고 확고한 취향이 느껴지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엔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무리들의, 취해버려 증발하는 수다보다, 낯선 음악들에 사로잡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음악의 흐름에 따라 온몸에 전율하는 감각들, 그것은 실재하는 자신의 삶보다 더 실제 같은 세계를 그에게 펼쳐 보이곤 했다. 그렇게 전해진 재현의 세계는 그의 진짜 삶보다 극적인 면에서 더 현실 같았다. 그는 가사 속에 숨겨져 있는 서사에서 자신이 겪어 본 일 없던 오래된 승리를 맛보기도 했고, 전에 없던 영광의 재탈환— 심지어 그는 영광을 누려본 적도 없는데도 말이다— 을 꾀해 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격정된 음의 높낮이에서 언어가 주지 못하는 즉흥적인 자유를 만끽했고 그는 처음으로 삶의 생동감 같은 것을 느꼈다. 밋밋하고 편편한, 단조로운 삶을 살던 그는 그곳에서 굴곡진 삶의 단편들을 엿보게 된 것이다. 그곳은, 그를 해방시켜줄 것 같은 서사로 가득했다고, 그는 그날 밤을 기억했다.

다음 날, 그는 엄청난 숙취를 경험했고, 다시 겨우 기력을 되찾게 된 이른 저녁, 전날 밤의 강렬한 기억으로 그곳을 다시 찾으려 집을 나섰다. 그는 그 부근 어귀를 샅샅이 다 뒤져보았지만, 그곳만큼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몇 차례고 동네를 헤집으며 그곳을 찾아 헤매었고, 번번이 실망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거듭된 실패 후, 그의 삶 속에서 그곳은 서서히 잊혀 가고 있었다.

이후, 그는 벅차오르도록 그를 자극했던 기억들로, 지시하는 대로 살던 삶에서 조금씩 비껴갔고, 미세하게 각도를 달리한 그의 발자국은 표본에서 차츰 멀어졌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밤, 그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몇 년을 운영해 익숙했던 그의 공간인데도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한동안 그는 그런 기분의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잠든 기억을 되짚은 후에야, 그는 떠올릴 수 있었다.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던 그날 밤, 그 장소를. 그리고 그곳은, 그가 몇십 년 뒤에 차려 운영하던 바로 이곳이었다는 것을.

전후 사정이 무엇이며,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무엇이 먼저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과거의 취기 속에서 그가 자신의 미래를 향한 일종의 계시를 보았던 것인지, 그가 마련한 이 공간에서 과거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혹은 단지 엄청난 만취 속에서 겪었다 여긴 환영인지, 단순한 기억의 왜곡이었는지⋯⋯.

하지만 이것들 중 무엇이 사실이라도 상관 없었다. 세월이 그를 떠밀어 여기까지 오게 했을지라도, 걸음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바꾸게 된 그 계기로, 그가 꿈꾸던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 그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언제고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일지 모르지만, 칵테일을 추천해달라 하는 어중이떠중이를. 그리고 그에게 꼭 모스코 뮬을 만들어주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

음성 TTS는 TTS메이커을 사용하여 제작하였습니다.
본 내용은 『무명한 이야기』에 수록된 「모스코 뮬」입니다.
쓴 사람 김만복 │ 기획·편집·제작 이열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