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나 스토리 라인이 뚜렷한, 내지는 반전이 탄탄한 그런 작품들을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는다. 스포 하나에 무너질 작품이라면 대체 왜 공을 들여 글씨를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는 이유도 있고. 어느 순간, 서사는 닳고 닳은 것이 되어버려 아무래도 문학의 죽음을 목도할 무렵, 차라리 내면을 이야기하는 작가들, 또는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과 세계관을 열어 주던 작품들을 만나게 된 이후로, 서사도 서사이지만 그것을 이루는 사소한 단어와 문장들, 순간들, 인물들 하나 하나가 모두 작품 속에서 그에 눈이 머무를 만한 어떤 포인트와 그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믿어 왔기 때문이다. 『2666』 역시 그러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기에 여기 등장한 수많은 인물들의 목소리를 빌어 써 보고자 한다.

그가 본 것은 기댈 곳 없는 이미지, 이 세상 모든 고아의 몸 안에 담긴 이미지, 파편들, 파편들이었다.

어쩌면 보기에 따라 스포가 되겠지만, 『2666』은 완결적 서사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답답하고 허망한 책이 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5권에 걸친 여러 장편을 통해 개개인의 서사는 존재하지만 그 누구의 서사에서도 완결성을 띈 결말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은, 아르킴볼디의 비평가들이 어떤 관계를 종국에는 갖게 되는지, 아르킴볼디가 노벨문학상을 받게는 되는지, 그의 조카 카를로스의 재판 결과는 어떠한지, 산타테레사의 수많은 여성 살인 사건의 수사는 어느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지, 아말피타노는 대체 『기하학 유언』이란 이상한 책을 빨랫줄에 걸어 놓는 것인지, 아말피타노의 딸 로사와 기자 페이트는 산타테레사를 떠나 어떤 삶을 사는지, 같은 결말들을 영영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1권에 등장하는 아르킴볼디를 둘러싼 비평가들이 그의 흔적을 좇아 산타테레사에 갔지만 결국엔 그를 만날 수 없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 비평가들은 그 순간이 아르킴볼디와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을 뿐이라는 어렴풋하고도 절망적인 감각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마치 『2666』을 다 읽고도 결코 선명한 결말 따위를 마주할 수 없을 거란 암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난 자네가 도서관에 끊임없이 드나들면서 경험을 얻을 수 없을 거라고 말하지 않겠네. 하지만 도서관보다 실제 경험이 더 중요하다네.

결국엔 마주하게 되는 사건, 문장, 인물 중 읽는 사람이 어디를 응시하며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작품은 다른 것이 될 것이었다. 우린 습관처럼 특정한 사건, 완결된 메시지를 통해서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만 사실 모든 것은 도처에 있다. 삶 역시도 여기 나오는 여느 개개인의 서사가 그러하듯 완결성을 가진 무엇이 아니라 파편화되어 있고, 때론 개연성이 없으며, 어딘가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순간들이 있으며, 무엇인가가 끝날 것 같은 무렵, 새로운 무언가가 등장하는 식이다. 따라서 읽는 내내 차라리 무언가 얻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에 이르기도 했고, 목적이 아닌 행위 자체에, 그러니까 거대한 중심이 아닌, 단어, 문장, 감정들에 순간 순간 잘 머무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는 마치 5권 아르킴볼디가 먹고 살만한 돈이 생긴 이후에 정원사 일인지를 그만두는 게 어떠냐는 부비스의 말에 시시포스를 인용한 것 마냥, 돌을 굴리는 것의 목적보다는 행위 자체에서 얻는 일상이 이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였다. 삶 없는 글은 없고, 문장 없는 서사는 없다.

명성과 문학은 화해 불가능한 적이었다.

노벨문학상 시즌에 『2666』을 읽는 것은 또한 시기적 행운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매년 폭풍처럼 지나가는 한 차례의 호들갑(이렇게 표현하여 죄송하나;)에 대한 어떤 통쾌하고도 재치있는 냉소와 더불어 어느 지점에선 볼라뇨가 생각하는 글과 문학에 대한 태도가 숨어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재치와 냉소는 2권 무렵 나타난다. 페이트가 누군가를 취재하러 갔는데, 그 누군가는 그 지역에서 아마도 이름 깨나 떨친 명사인지 무슨 연사 정도로 초청되어 설교 내지는 강의 같은 것을 하는데, 진지하게 그 강의의 내용을 따라가다 마지막에 마주하는 추천 책의 제목은 『볼테르 전집 요약 다이제스트』..

그런가 하면, 5권 중반부엔 이런 문학상을 도마에 올려놓고는, 무엇을 위하는지, 어디를 향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오로지 무언가를 키워가기만 하는 학술원와기업, 대학과 정부 기관이 만들어가는 이런 명성과 역할 놀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이렇게 명성은 허망하고 또 허망하다. 잘 해 보아야 짜치는 책 추천이고, 명성에 편승하여 만들어진 역사에 부역하는 놀이의 패에 불과할 뿐이다.

겉모습은 현실을 점유하는 힘이야. 그는 생각했다. 겉모습은 기억을 정돈하고 앞뒤 사건을 정리하는 방식처럼 사람들의 영혼을 비롯해 사람들의 행동과 의지, 그리고 고통 속에서 살았다. 그것은 생산업자들의 거실과 암흑가에서 증식되었다. 규정을 공포했고, 자기 스스로의 규정을 뒤흔들었으며(피비린내 나는 반항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겉모습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규정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렇게 겉모습에 불과할 뿐인 무언가가 현실을 만들고 또 잠식하고 역사를 만들어낸다는 것. 그리고 그 겉모습이 삶을 구분짓고 규정하고, 갈라놓는다. 이를테면, 4권 내내 이어지는, 실제로는 지루하리만큼의 나열과 멘탈 털릴만큼 연속된 여성 연쇄 살인 사건이 그 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누군가 계속 죽어 나가지만 사회는 놀라우리만치 관심이 없다.

그에게 중요한 건 이름이었다.

때때로 신원불상의 희생자들이 이씩도 하지만 볼라뇨는 이런 희생자들에게 이름을 부여한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에게 이름과 때로는 그들의 삶과 일상 역시 함께 조명한다.(전혀 다른 결에서 『아메리카 나치 문학』에서도 이름이 주어진다.)

노예선에서 죽은 흑인들 역시 사회의 구성원으로 여겨지지 않은 거야. (중략) 그러니까 말은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보다 오히려 숨기려는 목적으로 더욱 많이 사용된 거야. 아니, 무언가를 드러낼 수도 있었지. 하지만 무엇을 드러냈을까?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누군가는 사회와 현실과 역사에서 배제된다는 것.

성모는 한쪽 눈을 떴지만, 다른 한쪽 눈은 감고 있었던 것이다.

남아메리카는 어느 세계 속에선 관심 밖의 지역이라는 것.

이토록 현실은 경계를 명확히 하며 구분선을 그어 놓고 그 안과 밖을 뚜렷이 하려 한다. 그러나 3권 이후로 내내 이어지는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점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지만 멕시코에 있으면서는 딱히 아프라카계,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그의 표현은 국경의 경계 때문일까, 태어난 장소 때문일까, 하는 정체성의 물음부터 시작하여, 그런 그가 살인 사건을 취재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고기를 아무 생각 없이 맛있게 먹는 장면, 예언자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살인자의 얼굴은 그저 평범한 얼굴이며 살인자의 얼굴은 아니라는 말 등등.

그 중에서도 경계를 허무는 가장 상징적인 예는 아무래도 〈아르킴볼디〉란 이름 자체가 아닐까 싶다. 한스 라이터, 그는 안스키의 글을 읽다가 였던가, 요세푸느 아르침볼도라는 이름을 발견하고는 그 이름을 딴 것 같은 필명을 후에 갖기로 한다. 궁금하여 찾아보니 각종 과일들로 형태를 빚은 듯한 초상화들.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총체적 형태와 그 총체적 형태와는 또 다른 구성 요소인 과일들, 다층적으로 구성되어 다시 얼굴의 형태를 띄는 그림. 과일인 것 같으면서도 사람처럼 보이고 사람처럼 보임에도 결국엔 과일인 묘한 그림을 그린 사람.

꿈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한다. 꿈과 현실의 뒤섞임 속에 우리가 인지하는 것이 진정 〈현실〉인가 하는 의문. 어떠한 판단 기준도 그저 개인적이고 시대적이며 지역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 그리하여..

이제는 아무도 식물학자 퓌르스트 퓌클러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모범적인 정원사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아무도 그가 쓴 책을 읽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모두가 퓌르스트 퓌클러를 먹어 본 적이 있지요.

결국, 삶은 이런 식이다. 일관성과 완결성은 단지 사후 조립되는 어떤 기억이며, 그 조립된 기억은, 그 기억 속의 인물들의 의도대로 흐르지도 기억되지도 않는다. 책 말미에 당혹스레 등장하는 퓌르스트 퓌클러처럼 아르킴볼디와 그의 삶, 작품 역시 난무하는 추측, 무성한 소문, 비평가들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해석의 세계관 속에서 재해석된다.

아르킴볼디는 이제 그의 일부였고, 그가 몇몇 사람과 함께 그 독일 작가를 다른 방식으로 읽기 시작하면서 그에게 속해 있었다. 그런 그의 독서, 그러니까 아르킴볼디의 작품처럼 야심찬 책 읽기는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생각도 해 보게 된다. 볼라뇨는 자신의 작품 역시 이러 저러한 미스테리 속에 독자 속에서 일부이고 또 누군가의 삶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또 야심차게 지속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과연 내가 대체 볼라뇨에 대해, 그의 삶에 대해, 그의 작품에 대해 뭘 알 수 있다고 감히 속단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2666』 속 부비스 부인이 했던 말을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가령 나는 그로츠의 작품을 몹시 사랑해요. 하지만 내가 정말로 그의 작품을 알고 있을까요?

※ 발췌한 부분은 모두 『2666』, 로베르토 볼라뇨(송병선 역, 열린책들)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