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포함한 모든 인칭 대명사와 이니셜은 특정 인물, 젠더를 지칭하지 않습니다. 또한,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사건, 상표, 지명, 직업, 직업에 대한 묘사 등은 모두 실제와 관계없는 허구임을 명시합니다.
O와의 마지막 비무는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는 O에게서 상당한 참패를 겪은 이후 천하의 비급인 영권무를 어렵사리 구했고, 그 비급의 내용으로 뼈를 깎는 수련을 하며 무공에 정진했다.
강산이 서너 번 정도 바뀌었을 즈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을 걸고 흘린 땀방울을 보상받고자 O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수많은 비무 끝에 O만 쓰러뜨리게 되면 그를 이길 자는 무림에 없었다.
그는 오랜 기억을 되짚어 O의 거처를 찾아갔다. 그러나 O의 거처는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았던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듯이. 그는 문득 평생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졌다.
그 순간, 구름 사이로 아스라이 희미한 형체가 나타났다.
O였다.
고대하던 O와의 재회.
놀랍게도 O의 모습에서는 그동안의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의 모습에서 한 치도 변치 않은 모습을 보며 ‘아무래도 높은 무공으로 가능한 것이겠지.’ 하고 그는 침착하게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시간의 순리를 따르자면 O는 이미 70 노인일 테지만 40대 초반 모습 그대로였던 것에 비해 그의 모습은 50세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무공에 매진할 동안 O라고 제자리에 머물렀겠는가. O가 예전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직감하자 그의 마음 깊은 곳부터 긴장감이 솟아올랐다.
그는 O에게 자신을 기억하는지 물었다. O는 너무나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고 답했고, 그는 적어도 자신이 O에게 인상을 남겼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했다. 어느 정도 인정받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는 예전의 비무 이후 무공에 전념했고 자신의 무공을 시험하고자 이곳에 왔다고, 한 수 배울 수 있겠느냐며 예를 갖췄다.
“알고 있었네. 시작하지.”
O가 지체 없이 시작을 알리자 그는 빠르게 일격을 가하려 O에게 향했다. 그는 O에게 달려들자마자 놀라 자빠질 뻔했다. 그가 놀랐던 이유는 첫째로, O가 그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로 공격을 그대로 받고도 O에게서 외상은 물론 내상조차 입지 않은 듯한 멀쩡하고 동요되지 않은 모습 때문이었다. ‘도대체 O의 무공은 어느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그는 감탄하면서도 자신의 세월이 애처롭게 생각되었다. 그리고는 O가 어떤 수련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몇 초식을 더 시도해 보았으나 O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그는 O의 무공에 탄복하고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그는 O에게 대체 어떤 무공을 익혔기에 이토록 귀신 같은 방법으로 싸울 수가 있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이것도 무공이라면 무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O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낮게 읊조렸다. 그런 수수께끼 같은 대답에 그는 더욱 안달이 났다. 평생을 무림 제일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해왔으나 O의 벽이 그토록 높다는 사실에, 그는 O에게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알려달라 거듭 부탁을 했고, O는 애초에 감출 생각조차 없었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사실 나의 몸은 오래전에 죽음을 맞이했다네. 이해가 어려울 수는 있겠네만⋯⋯. 혹시 차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나? 우리의 세계는, 그러니까 이곳에서의 삶을 살았던 나와 지금 자네의 세계는 3차원이란 곳이네. 이를테면 자네가 속한 세계에서는 2차원의 세계와 1차원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지. 그러나 낮은 차원에서는 보다 높은 차원을 인식조차 할 수 없다네.
죽음이 가까워져 올 즈음, 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접어드는 기술을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되었다네. 자네가 나와 겨루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지. 나는 당시에 이미 병마와 싸우고 있었고, 나는 내공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을 뿐이었네. 내겐 죽음, 아니면 누구도 경험해 본 일이 없던 차원의 문턱을 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네. 어리석게도, 죽을 바에야 그곳에 가 닿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지.
그곳에 이르자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아나? 내가 겪은 것을 이런 언어로밖에 해명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게. 일생 동안의 모든 일들이 또렷하게 기억이 나더군, 심지어 미래의 일까지 말이야. 그 기술로 나는 모든 시간을 동시에 겪을 수 있게 되었다네. 그런 연유로 자네가 여길 찾아올 것도 알고 있었다네.
그러나 자네는 무엇보다 내가 어떤 무공으로 자네를 상대했는지가 가장 궁금할 것이네만 실은 난 무공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네. 내가 죽었다는 말을 기억할걸세. 하지만 난 영혼도 아니라네. 나는 내가 기거하는 차원에서 입력하여 자네 세계에 출력된 인식의 재현일 뿐이지. 자네가 보고 있는 것은 그러니 실재하는 내가 아닐 수도 있겠네만 동시에 나의 의지의 결과물이기에 실재일 수도 있다네. 하지만 그렇다고 물리적 실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
나는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내가 인식하고 있는 것조차 실재하는가에 대해서까지 의심하고 있다네. 우리 중 대체 그 누가 우리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무공이야⋯⋯. 자네가 존재한다고 믿는 이 세계조차 자네가 인지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결과물일 수도 있다는 뜻이네.
자네는 나를 이겨야겠다고 오래도록 생각해왔겠지만 이기고 지는 것은 그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네. 자네 세상에선 승패가 어떤 노력의 결과로, 인과로 인식될테지만 어찌 보면 그저 다른 차원에서 입력된, 인과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하나의 독립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네. 방금 일어난 사건을 비무라고 할 수 있다면, 지금 이 비무의 결과가 자네와 나의 무공 차이 때문이 아니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네.
내가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일세. 솔직히 말하면 자네가 내 이야기를 이해했으리라 생각지는 않네만, 본디 인간은 겪어보지 않은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니⋯⋯.”
여기까지 말을 이어온 O는 찰나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얼이 빠졌다. 장장 30~40년의 세월이었다. 그 시간을 헛된 세월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차원? 그 잘난 비급이 어디 있다는 건지⋯⋯.’
그는 어떻게든 O를 다시 만나러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O가 말했던 그 궁극의 비급이라는 차원의 문을 찾기 위해⋯⋯. ◆
음성 TTS는 TTS메이커을 사용하여 제작하였습니다.
본 내용은 『무명한 이야기』에 수록된 「영권무」입니다.
쓴 사람 김만복 │ 기획·편집·제작 이열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