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포함한 모든 인칭 대명사와 이니셜은 특정 인물, 젠더를 지칭하지 않습니다. 또한,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사건, 상표, 지명, 직업, 직업에 대한 묘사 등은 모두 실제와 관계없는 허구임을 명시합니다.

진실의 대가

자라 오른 식물들이 흐드러진 정원, 에메랄드빛 지붕, 흰 외벽이 바랜 건물,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무 바닥이 긴 복도를 향해 깔려 있었고, 각각의 방들은 복도의 곳곳으로 또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익숙한 한편 작위적인 화려함 때문에 피곤이 앞서는 집이었다. 넓은 만큼 답답했고 저택의 고풍스러움은 괴리감을 더해 나는 집에 있어도 항상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런 집에서 유일하게 쉼이 가능한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지하실로 연결된 작은 창고 같은 공간이었다. 창고는 아래층으로 난 계단을 통해 지하실 문으로 닿았다. 창고 벽과 지하실 문으로 이어지는 계단까지는 벽 한 측면이 모두 거울이었고, 그나마도 빛이 잘 들지 않아 거울이 비추는 형상이 특별하게 부각되는 일도 없었다.

나는 어둡고 초라하고 먹먹한 그곳에서 마음이 편했다. 나는 그 애와 그곳에 자주 누워 있었다. 그 애는 나와 함께 자랐고, 우리는 많은 시간을 꼭 붙어 보냈다. 화려함을 누리는 것보다 창고에서 키득거리는 것이, 좁디좁은 안락함을 만끽하는 편이 좋았다. 그럴 때면, 모든 피로함, 피로를 응축한 시간의 바깥에 자리한 느낌이었다. 가장된 풍요로움으로 숨이 막힐 것 같은 저택도 무언가가 도사릴 것 같은 두려움을 머금은 지하실도 아닌 중간의 지대, 그곳에서 나는 그 애와 함께 얼마든지 시간을 밀어낼 수 있었다.

오랫동안 나는 그 창고로 만족했다. 하지만 무료함이 창고에 켜켜이 앉아 쌓일 즈음 나는 지하실을 향해 피어오르던 호기심을 억누르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호기심은 금세 두려움만큼이나 불어나 나를 압도했다.

내가 처음 지하실을 기웃거리던 날, 그 애가 창백하게 겁에 질려 나를 쳐다보았다. 명백한 금지의 표정, 내가 지하실 문에 손이라도 대었다가는 그 애는 금방이라도 쓰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지하실엔 얼씬도 하지 않거나 그 애 모르게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대충 기회를 보아 집안에 고요함이 찾아들면, 나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지하실로 향하려 했다. 그렇지만 그 애는 어떻게 눈치를 챈 것인지 더욱 빈번하게 내 옆에 따라붙어 있으려 했다. 그럴수록 나는 방해 받는 기분이 들어 지하실로 들어가고 싶은, 더 큰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우리는 호기심과 두려움, 각자의 욕망과 금기, 그리고 자존심을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강박적으로 두려움에 접근하고 싶어 했고, 내 마음이 동할수록, 그 애는 내게 발걸음을 멈춰달라고 절절하게 애원했다.

이런 시도가 계속되자 나는 그 애가 우습게 여겨지기도 했고 약이 오르기도 했다. 그 애는 그 애 나름대로 내가 짜증스럽거나 무섭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양극단에서 서로를 더 자극하며 필사적으로 도발했다.

그러나 물러서 생각해 보면 어차피 나 혼자 지하실로 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실은 나도 그만큼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 애를 비겁하게 여길 게 아니라 설득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애도 궁금한지 몰라,

하는 생각이 스치자 나는 차분히 시간을 가지며 그 애를 어르고 달래고 구슬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우리가 관계를 회복하기까지는, 서로 당기었던 줄다리기의 날들 이상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겨우 그 애를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 애 역시 나에 대한 신뢰를 되찾게 되었을 즈음, 우리는 지하실에 함께 가 보기로 했다.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음에도 막상 지하실 문 앞에 덜컥 다다르자 그 애가 아니라 내 쪽에서 문 열기를 미루고 싶어져 망설이며 뜸을 들였다. 그 애와 나는 두려움을 축으로 두고 마치 시소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시소는 양쪽으로 심하게 기울다가 조금씩 조금씩 평형을 찾아갔다. 우리는 서로의 도망으로부터 족쇄를 채워 가까스로 서로를 길들였다.

아마도, 우리는 같이 있으니 괜찮을 거야

장막은 덮여 있기 때문에 두려운 법이지

그걸 들추면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말 못 들어봤어?

막상 거둬내 버리면 아무것도 아닐 거야

진짜?

뭐가 있더라도 그게 뭐 대단한 거겠어?

내가 있잖아

옆에 있어 줄 거지?

그럼

나는 항상 네 옆에 있어

우리는 천천히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긴장으로 손이 땀으로 물들었지만, 그 애가 내 옆에 있다고 생각하자 나는 어쩐지 용기가 생겼고 기운이 조금 났다. 그리고 아마 그 애도 그럴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잠깐만, 어쩌면 내게 필요했던 것은 지하실 문 너머의 진실이 아니라 그 애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지하실 따위가 아니라 차라리 그 애의 마음을 잔뜩 어지럽혀 놓는 것이라든가 어지러운 맘을 풀어 평화를 되찾게 하는 것 역시 나였으면 했기에 그 애가 미웠던 한편 필요하다고 되뇌고 손 내밀었던 것은 아닐까. 그 찰나의 순간, 마음이 복잡했고, 문을 열기로 하고야 만 것을 후회했다. 다시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강렬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문은 열렸고 그곳에는

난도질 되어 피가 낭자한 시체가 있었다. 그리고 처참하게 고통으로 얼룩진 그 사체에서 그 애의 얼굴이 보였다. 다급하게 그 애가 있던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 애는 흔적조차 없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그제야 나는 거울 속의 내 얼굴이 그 애와 꼭 같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

마포꽃섬과 프리텐다드 서체를 사용했습니다.
음성 TTS는 TTS메이커을 사용하여 제작하였습니다.
본 내용은 『무명한 이야기』에 수록된 「진실의 대가」입니다.
쓴 사람 김만복 │ 편집·기획·제작 이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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