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포함한 모든 인칭 대명사와 이니셜은 특정 인물, 젠더를 지칭하지 않습니다. 또한,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사건, 상표, 지명, 직업, 직업에 대한 묘사 등은 모두 실제와 관계없는 허구임을 명시합니다.

시뮬레이션 HC-00042

우리는 조금씩 이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구는, 아니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사지로 밀어 넣고 있었다. 때문에 누구라도 끝을 예감하고 있던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 끝이 난다 해도 이상한 게 없는 시대였다.

사람들은 더위를 피하려 전력으로, 오염에서 벗어나 저개발 지역의 청정함으로, 실수를 모면하기 위해 갈등을 외면하는 식으로, 전력을 다해 도피했다. 결국, 세포막 같은 견고한 콘크리트를 사이에 둔 채 고립되기도 했지만, 그것이 임시방편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고립은 차치하더라도 아무리 단단한 콘크리트를 가지고 있다 한들 닥쳐올 미래를 막아낼 수는 없었으니까.

상황은 날로 악화하였다. 삶의 터전과 일상을 빼앗긴 사람들은 이로 인해 소중한 사람들뿐 아니라 자신의 삶까지도 영원히 잃어버리고야 말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불안에 떨었다. 그것은 단지 음모론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를 조여드는 수만 가지 신호들이 우리 곁에 무작위로 떨어지는 폭탄처럼 나타났다.

그런 불안 속에서 탄생한 인류 삶의 대안이란, 해저 도시 건설도, 화성도, 새로운 태양계의 지구를 닮은 다른 행성 같은 것도, 거대한 우주선도 아니었다. 시간 여행이나 평행 우주가 아니라고 확언을 할 수는 없겠지만, 물리적 이주는 당시로선 요원했고, 우리는 차라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업로드 되었다.

게임 서버를 구축하는 개발자들이 큰 역할을 했다. 세계관은 물리적 세계였던 지구와 최대한 유사하게 마련되었고 개인은 자신이 소유한 기기들에 최대한 많은 데이터, 즉 자신이라는 데이터로 업로드되어, 우리 모두는 연결된 서버에서 만날 수 있게끔 프로그래밍되었다. 우리가 잃고 만 사람들, 함께 살던 반려동물 또는 돌고래와 같은 생명체들은 NPC 같은 개념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의해 꾸려져 서버에 같이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분야의 학자들과 개발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인류가 쌓아온 방대한 지식과 편의 시설들을 갖춰 놓으려 애를 썼고, 어떤 사람들은 전자화되지 않은 책이나 콘텐츠들까지 온라인화하기도 했다. 이 모든 일들은 노아의 방주를 방불케 했고, 실제로 온라인판 노아의 방주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주에 오르지 못한 이들도 있었으니 빈부는 이 이주에조차 반영되었다. 기기가 없다거나, 연줄이나 연고가 없는 사각지대의 사람들이 누락되는가 하면, 사람들이 지구에서 그렇게도 찾아대던 청정 저개발국, 그곳의 빈민 역시도 유실되었다. 반면, 데이터 업로더들의 기억 속에, 그 빈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휴양지는 백그라운드 중 하나로, 마치 파라다이스의 모습으로 구현되었다.

운이 좋게도 방주에 올라탄 사람들은— 나 역시도 그들 중 하나였다— 인류의 플랜 B, 새로운 터전에서 전자화된 삶을 누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데이터로 남았고 물리적 실체의 삶을 포기한 대신 서버에서의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더 이상 콘크리트 속에 갇혀 서로를 만지지 못 하는 일도 없었다. 그게 정녕 만지는 것이라는 가정하에 우리는 원 없이 서로에 닿았다. 육체가 없다 해도 실현된 모습으로, 이전의 습관처럼 서로 닿게 하는 식으로, 애정과 관계를 표현했다. 포옹의 아늑함이라든가 숨결의 생동감 같은 것들은 우리의 몸과 함께 영영 잃고 말았지만, 어느 정도는 대다수가 만족할만한 커뮤니티가 형성되었고 성과도 꽤 좋아 새로운 자유와 평등 속에서 평화를 되찾는 듯싶었다.

얼마간 우리는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이곳에서 역시 지구와 비슷한 현상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기 시작했다. 자연재해, 오염, 질병, 갈등의 조짐과 같은 문제들로, 그 양상은 업로드 당시의 지구 상황과 같았다. 처음에는 원인을 알 수 없었으나 개발자들을 비롯한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이 모여 이 현상들을 여러 가지 차원에서 분석하고 사태의 실체를 밝히려 갖은 노력을 다했다.

원인은 예상보다 빠르게 밝혀졌다. 문제는 구축된 세계의 백그라운드와 NPC들이었다. 우리의 기억을 토대로 복구해낸 세계와 구현된 생명체들에게서 버그가 발견되었다. 기억에 의존하여 재현된 이 세계는 우리 기억에서 따로 떼어낼 수 없었던, 잊을 수 없었던 당시의 흐름,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어쩔 수 없이 딸려온 기억들 때문에, 이주한 이곳의 알고리즘은 결국 인류 멸망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NPC들,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의 재현, 그들은 지구에서와 똑같은 방식으로 병들고 죽어갔다. 우리는 그들을 두 번이나 잃은 셈이었다. 인류를 죄어오던 불안의 조짐들, 그 공포 역시 다시 우리를 압도했다. 서버 자체가 다운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공지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우리에게 이주할 곳은 없다.

우리는 곧 유실될 것이다.

나는 인류의 멸망을 앞두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정말 인 것일까. 우리의 삶의 실체는 사실 저 너머 어디쯤에 있는 것은 아닐까. 업로드 된 세계, 즉 정신적 세계 속에서 지구에서와 같은 삶을 반복하고 있는 것과 꼭 같이, 지금이 비록 우리에게 끝으로 보일지라도, 사후 세계든 다른 차원이든,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간에, 어딘가의 사건의 지평선에 우리 삶의 진실이 기입되어 있고, 우리는 그 진실이란 것이 재현되는 하나의 상에 불과할는지. 그리하여 그 진실은, 비춰지는 형상만을 조금씩 달리하여 똑같은 삶을 영원토록 재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

마포꽃섬과 프리텐다드 서체를 사용했습니다.
음성 TTS는 TTS메이커을 사용하여 제작하였습니다.
본 내용은 『무명한 이야기』에 수록된 「시뮬레이션 HC-00042」입니다.
쓴 사람 김만복 │ 편집·기획·제작 이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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