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포함한 모든 인칭 대명사와 이니셜은 특정 인물, 젠더를 지칭하지 않습니다. 또한,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사건, 상표, 지명, 직업, 직업에 대한 묘사 등은 모두 실제와 관계없는 허구임을 명시합니다.
무명이 우리 마을에 나타난 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는 소리 소문 없이 뭉근하게 또 은은하게 우리 마을에 녹아들었다. 옆에 있다는 기척도 없이 어느새 나타났다 또 사라지곤 하던 것이었다. 우리는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당신은 이름이 뭡니까?
이름이요? 그게 뭐죠?
당신을 부르는 말이요.
아무도 저를 무어라 부른 적이 없는데요?
그럼 당신의 부모는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당신의 고향 마을은 어디이고, 하다못해 태어난 달이나 계절 같은 게 있을 게 아닙니까?
나는 나를 낳아 기른 사람들이 누구인지 몰라요. 키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면 아무의 손에서 키워졌고 누구에게서도 키워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 고향을 알 수 있을 리 없지요. 손에 손을 타고 자란 내게 가장 먼 기억이라곤 글쎄요, 그것도 특별히 잘 모르겠군요.
우리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이름이 없다는 건 상상해 본 일도 없었고, 누구로부터 났는지, 어디에서 자랐는지, 언제 나게 되어 응당 이름이 붙여져야 할 날이나 계절조차 흔적에 없는 사람이라니. 우리같이 작은 마을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우리는 마을의 중소대사를 서로 꿰뚫고 있었고 그러므로 서로의 이름을 모르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 그가 우리와 유사한 점이 있다면 어쩌면 아무의 손에서 키워졌고 누구에게서도 키워지지 않았다는 그 정도일 수도 있겠으나, 모두가 키워낸 아이들이 마을에 있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그는 그렇게 말한 것일 테다.
그럼 그는 우리라고 불려야 할까? 그것은 단연코 우리들을 이를 때에 부르는 말이므로, 그리고 사실 그가 우리에 속한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혼란의 여지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아무일까? 그도 아니라면 아무도 아닌 것일까? 우리 마을의 사람들은 이름 붙이기라는 중대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너무 몰두한 나머지 평소에 아이들에게 어떻게 이름을 붙이는지조차 까먹을 정도였다. 아이에게 어떤 기대를 하고 정 붙인 단어를 일단 달아주는 것과 사람을 먼저 마주하고 그에게 이름 붙이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럴 땐, 의미를 만드는 게 아니라 어쩌면 그가 가진 의미를 붙여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심지어는 그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었다.
우리는 한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에게 어떠한 특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뜯어 보다 보면, 그에게 딱히 우리 마을의 카테고리에 적합한 어떤 특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그는 건넛집 A와 피부가 닮아 있었다. 그런가 하면 B와는 길죽한 손가락이 닮아 있었고, 요리조리 잘 뜯어보면 C와 머리카락이 구불구불한 것이 비슷해 보였다. 멀리서 보면 D와 키가 비슷해 헷갈릴 것 같은 느낌인데, 가까이서 보면 또 E와 얼굴 생김새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그의 특성을 우리 마을의 구분법상으로 특징지어 의미를 새긴 이름을 지어주어야지 하고 있었지만, 그가 딱히 구분법에 들어갈 만한 어떤 뚜렷한 특징을 발견하기는커녕 마을 사람들 각각의 여기저기를 미세하게 조금씩만 유사할 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에서 경계를 흐려 이 사람과 저 사람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들고, 양극단의 사람들 사이에 낀 어떤 스펙트럼의 애매한 지점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 이름 없는 사람에게 이름을 지어주려 살기를 몇 달,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구분법을 잃어버렸다. 그를 도대체 어떤 카테고리에 넣어주어야 할지 가늠하는 기준들을 그의 존재가 우리의 거듭한 고민 끝에 다 지워버리고야 만 것이다. 그렇게 이름 없는 사람을 매개로 A는 B와 닮았고, B는 또 C와 유사하며, 그렇게 이 사람과 저 사람의 특징들은 꼬리를 물고 Z까지 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제야 깨달았다. 우리 모두에겐 이름이 없다는 것을.
본 내용은 『무명한 이야기』에 수록되지 않았으나 추후 별개로 기록했던 「무명한 이야기」 전문이며 본 내용은 〈 hgsu_2024〉zine에 수록되었습니다.
쓴 사람 김만복 │ 기획·편집·제작 이열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