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착된 영원, 지속하는 순간

어쩌면 결심의 순간이 꼭 커다란 사건이 동인이 되거나 필연적이지만은 않을지도 모르겠다. 비건 결심이 그랬기 때문이다. 물론, 원인이 결정적이지 않았다고 해서 결과도 그랬다는 건 아니다. 이 결심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바뀌었냐면,

까탈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해명하는 사람이 되었다.
불편한 사람이 되었다.

원래부터 저런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적어도 식사에 있어서는 그저 허기를 채우는 사람에서 ― 사실 이건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해야 하는 자리에선 ― 까다롭게 식당을 고르는 사람이 된 것이다. 식당을 고르고 나서도 끝이 아니다. 비건 식당이 흔하지도 않거니와 비건 식당이 아닌 곳에 가게 된다면 육수를 썼는지, 액젓이 들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해서 육수가 아닌 그냥 물로 끓여주실 수 있는지 묻거나, 이 반찬은 주지 않으셔도 돼요, 등등을 말하고 나면 실은 나조차도 이미 하루의 에너지를 다 소진해 버린 상태가 된다. 이쯤 되면, 아니 사실 이렇게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묻는다. 아직 물음이 불쾌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비아냥의 의도가 아니라면 나는 다음의 물음에 기꺼이 해명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비건이 됐어요?”

〈한스〉라는 도롱뇽

2023년 2월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당시 다니던 직장에서 카렐 차페크의 『도롱뇽과의 전쟁』,을 전자책으로 만들기로 하고 데이터를 옮겼다. 옮겨 열어 보니 꽤 예전의 데이터라 약물이 많이 깨져 있었다. 대조를 하느라 일일이 한 자 한 자를 읽어야 했기에 읽으며 확인하던 도중…….

우리는 우리가 〈한스〉라고 부르던 도롱뇽 한 마리를 먹었다. 과학적 작업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던 교육을 잘 받은 똑똑한 도롱뇽이었다. 예전에는 힝켈 박사의 부서에서 실험 조수로 일했는데, 아무리 엄밀한 화학 분석이라도 얼마든지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우리는 저녁마다 그 도롱뇽과 오랫동안 수다를 떨었고, 그 동물이 지닌 채워지지 않는 지식에 대한 갈망을 보며 즐겼다. 그런 한스를 잃은 것은 유감이지만, 어차피 그러기 전에 실험자가 수행한 두개골 절개 시술로 인해 시력을 잃은 참이었다. 그것의 고기는 시커멓고 스펀지처럼 퍽퍽했으나 불쾌한 후유증은 전혀 없었다.

– 『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김선형 역, 열린책들, 2010)

이 문단은 ‘주요’ 전개에 해당하는 부분이 전혀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 책의 주제가 ― 원작자의 의도와는 별개로 ― 동물권이 아니라고 단언하기도 애매해졌지만 읽을 시점에는 다른 인종을 착취하고 노예로 부리던 혼란의 20세기에 대한 은유 그 자체였다. 그런 표현의 수단 중 하나였을 이 지엽적인 부분에서 문득, 역겹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때 동료였던 누군가, 혹은 이름을 붙였고 어떤 관계를 형성했던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 시점, 나의 ‘동료’들은 내 앞과 뒤, 그리고 옆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찬거리를 사러 들른 마트에서 느낀 구역감, 그것이 시작이었다.

보이지 않던 세계들

고작 1년 남짓의 기간 동안 엄격한 비건으로 지내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맛에 민감하지 못하고 때때로 의식하지 못한 채 삼켰을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럴 때도 종종 있었으며, 무심코 구매한 무언가에 어떤 성분으로 분명 소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힘들고, 어렵지 않느냐는 물음에는, 물론, 힘들 때도 많았고 그것에 대해서는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아도 누구라도 각자의 입장에서 상상해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할 만했다. 일정 부분 운이 좋았다 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같이 비건 가능한 식당을 찾아봐 주는 동료들과 친구들, 가족들의 존재는 적어도 내 결심에 회의를 갖게 하거나 환멸을 느끼도록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흐르며 간사하게도 ‘조기구이’라든가 ‘보쌈’ 같은 명명으로 생각이 나기도 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삶의 기본값이었던 것이 달라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고, 그 기본값이라는 게 또한 사회의 기본값이기에 휩쓸릴 가능성이 도처에 존재하는 건 자명했다.

그 기본값을 다시 뒤엎을 연쇄는 올해 상반기 일어났다. 요약하자면 아시아 제바르의 책 『프랑스어의 실종』, 질로 폰테코르보의 영화 〈알제리 전투〉, 전시 〈텍스트 뷔페〉에서 읽게 된 곽수아 님의 글 〈죽음의 현장에서 진실의 증인이 되는 일〉로 이어지는 연쇄였다.

3년 가량 함께해 온 세계문학 북클럽 〈보이지 않는 세계들〉에서는 기존 영미/유럽 위주의 세계문학이 아닌, 가시적이지 않았던 세계를 보려는 취지로 아시아 문학, 남미 문학을 읽었고, 올해는 중동 문학을 함께 읽었다. 그중 마지막 책이었던 아시아 제바르의 『프랑스어의 실종』은 프랑스 식민 치하 알제리에 살던 주인공 베르칸이 알제리 독립 후 프랑스로 건너가 오래도록 살다가 알제(알제리의 수도)의 카스바로 귀향하고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 물론 이렇게 납작하게 요약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은 아니다. ― 중동, 알제리, 그와 관련한 모든 것이 생경했으나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국기와 관련하여 떠올린 주인공의 어린 시절 회상 장면이었다. 알제리 국기를 처음 보기 전까지 프랑스 국기가 자신 나라의 국기인 줄로만 알고 있다가 ‘진짜’ 자신의 국가의 깃발을 알게 된 베르칸은 수업 시간에 알제리의 국기를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학업을 지속하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단지 국기를 그렸다는 이유로 퇴학의 기로에 서게 된 이 ‘사건’ 자체가 프랑스 국기의 의미와 교차시켜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 한 일이다. 프랑스 국기의 의미는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보게 된 영화 〈알제리 전투〉는 알제리를 독립으로 이끌게 된 어떤 기폭제적 시작 ― 무차별적 테러 행위라고 불릴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지던 ― 에 해당하는 시기를 담담하게 보여주는데 이 역시 여러 가지로 모순적이었다. 단편적 사건들만 열거하여, 반나치 레지스탕스 운동을 한 프랑스 장교가 무차별 테러를 종식하기 위해 테러범들을 응징한다는 건 짐짓 정의로운 일처럼 비춰지지만, 테러범이라 일컬어지는 알제리 국민해방전선을 통해 항불운동을 했던 알제리의 역사적 맥락까지 들여다보게 되면 정당화의 문제를 떠나 양비론이 얼마나 허망한지, 폭력은 역사에 어떻게 기입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얼마나 현재적인지 돌이키게 된다. 그리고 영화를 보며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시민으로 대우받는, 유럽에서 온 백인들과 시민으로 인식되지 않는 알제리 사람들을 향한 적나라한 차별 ― 이를테면 통행의 자유부터 검열의 대상으로 선별되는 것까지 ― 이 수행되고 있을 때, ‘일반’의 유럽인이 비록 알제리 사람에게 직접적 폭력을 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걸 당연하게 여기고 그걸 누린 사람들은 과연 무결한가? 팔레스타인, 페미니즘, 동물권 등 많은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얼마 후 〈텍스트 뷔페〉 전시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마주하게 됐다.

홀로코스트 백과사전에서는 방관자를 홀로코스트와 유대인에 대한 폭력에 능동적으로 대항하지 않은 모든 사람이라고 말한다. 소극적으로 지켜보는 사람만을 방관자로 여기는 다른 사전들과는 달리 홀로코스트 백과사전은 적극적으로 시위하지 않은 모두가 방관자에 포함했다.

– 〈죽음의 현장에서 진실의 증인이 되는 일〉, 곽수아

분류, 그 스펙트럼의 어디쯤에서

세상은 골상학, 주인과 노예의 시대를 지나 바로 지난 세기까지만 해도 우수 인종과 그렇지 못한 인종으로 나누던 인종주의, 식민과 피지배의 시대였다. 지금이야 그러한 범주를 나누던 기준 자체가 허무맹랑한 억측이나 부적격한 이론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리하여 지난 모든 것이 과오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이런 범주에 기반한 차별과 폭력이 자행될 당시만 해도 너무 당연하고 확고한 기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이르러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을까? 인종, 성별과 젠더, 신체적 특징 등으로 인한 인간 간 차별은 아직도 유효한 논쟁거리다. 이런 차별은 대체 어떠한 분류를 기준으로 삼으며 또 그 분류의 근거는 무엇일까.
인종을 하나의 예로 들면, 남아메리카에는 유럽인과 토착인의 혼혈을 이르는 말이 다채롭다고 알고 있다. 현재에도 통용되는 단어들일지는 모르지만 메스티소, 촐로 등과 같이 하프와 쿼터를 지칭하는 단어가 따로 존재하는데 이미 대대손손 더더욱 ‘섞였을’ 인종을 대체 무슨 수로 가르며, 현재의 유럽인이라는 종과 남아메리카 토착인이라는 종은 또 얼마나 다를 것인가. 곰곰이 생각할수록 우리를 가르던 구분선은 쉽게 허물어져 내린다.

이들(도롱뇽들)은 〈Pelagobatrachus Hookeri〉, 〈Salamandtrops maritimus〉, 〈Abranchus giganteus〉, 〈Amphiuma gigas〉 등 수많은 이름들을 갖게 되었다. 일부 과학자들은 〈Pelagotriton Spencei〉가 〈Cryptobranchus Tinckeri〉와 동일하며 미냐르의 도롱뇽들은 다름 아닌 안드리아스 스케우크제리라고 주장했다. 우선순위라든가 기타 순전히 과학적인 문제들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논쟁들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급기야 각 나라의 자연사마다 각자의 왕도롱뇽들을 갖게 되고 다른 나라의 왕도롱뇽들에 맞서 맹렬한 과학 전쟁을 벌이는 사태에 이르렀다. 그 결과, 도롱뇽이라는 이 전반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과학적인 측면에서 끝내 만족스러운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 『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책에선 도롱뇽이 계통적으로 인간과 가까운 종족일지 모른다는 이론을 내놓기도 하며 이런저런 과학적 논쟁이 이루어지지만 끝끝내 도롱뇽의 분류에 있어 확실한 결과에 도달할 수는 없었다. 하여 위 대목은 질서를 찾아 지적 여정을 떠나지만 결국 개체 분류학상 과학적으로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다다른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이렇듯, 분류에는 어딘지 모를 함정이 있다. 견고하게 나와 타자를 가르고 있던 ‘종’이란 구획은 한낱 미약하게 세워둔 임시의 벽이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모든 분류체계와 분류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논리는 사실상 우리의 관념과 세계관을 결정짓는 하나의 커다란 밑바탕이 된다.* 우리는 편견 없는 맨경험으로 세계를 마주하는 게 아니라 분류체계 속에 구분 지어지고 구축된 세계의 좌표 어딘가에서 세계를 경험하고 인식하며 사고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구분이 근대의 구성물일 뿐이라면,

― 〈죽음의 현장에서 진실의 증인이 되는 일〉, 곽수아

이런 흐름에 이른 순간, ‘고기’였던 것이 틀림없던 무언가는 사체로 환원된다. 그리고 ‘음식’이었던 것들, 이를테면 ‘우유’, ‘달걀’ 같은 것들이 ‘음식’이 되기까지, 보이지 않던 ‘공정’ 속에 어떤 생명체가 어떠한 삶을 살게 되며 어떠한 희생을 치렀는지 알게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음식일 수 없었다. 사람 간 폭력과 살인과 강간을 당연하게도 혐오스럽게 여기는 이유와 같았다. 이전까지 그다지 감각하지 못했던 ‘교차 오염’에 대한 다른 비건 분들의 심정도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불편한 사람이 된다는 것

비건이 된 후로 느꼈던 당혹스러움은, 글 초반 언급했던 것처럼 불편함을 발생시키는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더라는 점이었다. 식당 선정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고 이런저런 ‘유난’, 동행한 이들에게 미치는 불편함까지. (여기서는 아보카도 환경 오염 이론 등의 비아냥과 관련한 이야기, 도덕적 우월감에 대한 이야기 등은 생략하기로 한다. 짧게 덧붙이자면 그런 것 따위 가진 적 없다.)
여지껏 눈칫밥으로 살아오며 거슬리지 않는 존재로 재련해 왔다고 자부(?)했는데 어떻게 해도 그런 거슬림을 소거할 수 없는 방법은커녕 그저 존재 자체로 불편함의 상징이 된 기분이었다. 나로 인해 같이 있는 사람들의 불편함,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모종의 마음의 짐이나 부채, 때로는 죄책감의 뉘앙스만 느껴져도 나까지 스스로가 불편해지곤 했다.
긴장감을 소환하여 끊임없이 불편을 초래하는 상황에 대해 여러 차례 생각해 보았다. 과연 이 불편함이 어디를 향하며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불편함의 지점들을 감지해 내는 민감함, 어딘지 모를 부채 의식은 오히려 전환의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누군가를 변화시키겠다는 오만한 생각 같은 건 버린지 오래지만, 그저 삶 속에서 실천해 나가는 것으로 하여금 누군가가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어쩌면 불편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썩 나쁜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일상이 일상이 아니도록 하는 순간의 균열, 그 작은 균열의 기점이 되는 불편함이라면 나도, 그리고 언젠가 마주하게 될 누군가도 기꺼이 감내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주변의 많은 친구, 동료, 가족들이 그러했고.

물론, 앞서 말했듯, 완벽한 비건으로 사느냐면, 확언하지 못하겠다. 때때로의 부주의, 제한된 환경도 그렇지만, 고백하자면 벌레와 곤충은 아직도 너무 힘든 벽이다. 하지만 그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에서 수행하며 지내며 언젠가는 이 부질없는 경계를 허물어 벌레들과도 잘 지낼 날이 오기를 바랄 따름이다.

포착된 영원, 지속하는 순간

읽었던 책과 글, 그리고 보았던 영상은 시간 속에 훼손되지 않는 한, 멈추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면 포착될 일도 없었을 것이며, 그렇게 순간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지금으로 이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또 생명은, 무엇과 어떻게 공명하느냐에 따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고 지금이 아닌 다른 길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더불어 작품이 작품에 그치기만을 멎고 그에 숨을 불어넣는 것은 역시나 독자이자 청자일 것이란 믿음도 함께.

마지막으로, 다른 이들이 보여준 그들의 순간도 내겐 지금에 이르도록 한 잔잔한 파동의 시작이었다. 먼저 비건으로 실천하는 삶을 보여준 주변의 지인들, 수고로움이 따르더라도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던 직장 동료, 그들 역시 각자에게 포착되고 기입된 영원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삶에서 수행됨으로 인해 그들 삶 속에서 때로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삶 속에서 지속될 것이다. 그렇게, 영원과 순간은 서로를 교차하며 맞바꿔지는지도.

2024년 7월

※ 이 글은 앞서 비건을 실천하고 있던 주변의 지인분들에 빚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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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 (이규현 역, 민음사, 2012)의 표현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