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세계들은 2022년 처음 시작한 세계문학 북클럽의 이름이자 존재하지만 가시화 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은유라고 늘 생각한다. 북클럽은 2022년 아시아 문학, 남미 문학 세션이 이루어졌고, 2024년 1월부터 4월까지 중동 문학 세션이 진행되었다. 추후 아프리카 문학 세션을 계획 중이다. 느리지만 완주를 목표로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들

베트남을 여행할 때의 일이었다. 급하게 떠나게 되어 고작해야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만 익혀 간 곳, 뒤늦게 이것 저것을 찾아보아도 도통 알 수 없었던 기억. (당연하게도)영미권이나 유럽과는 달랐다. 영미권이나 유럽 사람들과는 영어로 어찌 어찌 알아 듣기도 하고 많은 것들이 익숙해져 있어 개개인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예측과 상상이 가능한 영역이었다면, 베트남은 그렇지 않았다. 보이는 것만을 볼 수 있을 뿐, 이면의 것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상상하거나 예견해보는 일조차 불가능했다. 어떤 곳들은 그렇게 암흑처럼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암전 같은 문화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때 많이 실감했다. 보통 여행 전에 관련 소설들이나 책들을 뒤적이는 편인데 이런 곳들은 여행서를 제외하면 도서관에서조차 그 나라의 저자가 쓴 책 한 권 발견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북클럽의 이름은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따 왔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실존하지 않는 도시들을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칸에게 읊어주는 것처럼, 이 모임으로 함께 읽을 책들과 이 모임이, 보이지 않던 세계들에 대한, 단편적일지언정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무래도 책으로 만나는 세계들은 실존하지 않는 세계의 편린일 수도 있고, 낯선 세계일 수도 있다.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함께 이 길을 밟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진행 중이다.

포스터의 세계에 대한 구분은 굉장히 서구적인 시각으로 분절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그로부터 시작하더라도 낯섦이 가시적으로 들어오려는 그때, 다른 분절들 혹은 경계 없는 세계를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 더 읽기 : 수집 상자에 지붕 올리기 (H 님의 브런치)


아시아 문학

2022. 04. 17 ~ 2022. 06. 26.

보이지 않는 세계들을 기획하며 쓴 마음이 곧 아시아 문학 세션을 연 계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세션을 시작하며 더는 할 말은 없다. 모임원 아체님의 브런치의 글을 빌려오기로...

▷ 함께 한 분들 : 노랑 님, 선영 님, 소희 님, 님, 혜수

☞ 더 읽기 : 명패 달기 - 보이지 않는 세계들(H 님의 브런치)

『물결의 비밀』, 아시아 문학선집

※ 책 정보 : 『물결의 비밀』 - 아시아 베스트 컬렉션, 바오 닌 외(김경원 외 역, 도서출판 아시아)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나라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보통은 아시아 문학이라고 하면 익숙한 것 같아도 동북아 3국(한중일) 외에 읽을 수 있는 문학이 극히 한정적이다. 소개도 번역도 전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하게 찾게 된 도서출판 아시아의 '아시아 문학선집'은 발견의 순간부터 반갑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매 세션의 첫 책은 여러 나라의 단편들을 모아 놓은 책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물결의 비밀』을 선택했는데, 그동안 읽을 수 없었던 미지의 곳들의 문학에 대한 갈증이 일부나마 해소까지는 아니고 충족도 아니고 시작되었다고 해야할까.

마음은 무겁게 시작했지만 그럭저럭 읽을만한 정도를 넘어 생각보다 재밌었고, 또 생소하기도 했던 한편 익숙하기도 했고, 장막을 걷기 시작한 것처럼 무지의 영역들에 닿기 시작한 것도 같았다.

우선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인 도서출판 아시아에서 「계간 아시아」를 발간 중이기도 하고, 꽤 오랜 발간으로 인해서 작품들이 엄선된 느낌이 읽으며 많이 들었다. 작가 소개란을 볼 때면, 정말 내로라하는 사람들일텐데 딴에는 처음 듣는 사실 자체가 스스로에겐 충격적이었다. 여튼 난 갓 입문한 것에 불과하지만서도 실린 작품들이 결코 얕지 않다고 자꾸만 생각하게 됐다. 더욱이 여성 작가들이 생각보다 많이 포함되어 있던 점도 좋았다.

「지 패오」, 「돼지기름 한 항아리」, 「곡쟁이」 같은 작품들이 내겐 마음에 많이 남았다. 북클럽을 통해서는 무심코 지나친 작품들도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며 되새기게 되었다.

특히 첫 번째 단편 「물결의 비밀」은 단선적으로 지나쳤던 작품인데, 이 작품과 또 다른 작품까지 연관지어 관통하는 의미를, 책이 「물결의 비밀」이란 단편으로 시작해서 이 선집이 어떤 물결로 나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말씀해주시기도 하셔서 책을 다시 되짚게 되는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아시아 문학을 읽으며 어떤 공통적인 지점들이 있었던가에 대한 질문 역시 내게는 모임의 의미를 더욱 부여하게 되었는데, 실은 첫 포스터 만들 때부터 많은 고민을 했다. 분절적 세계의 영역들이 결코 명확하지 않으리란 것도, 그 영역들이 어떤 지리적 객관성(객관성이란 허구..!)을 띄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지만. 또 아시아 문학이라고 함은 터키까지인지, 중동까지인지, 중동이라함은 북아프리카까지인 것인지, 그럼 아프리카 문학은 어디까지인 것인지 하는 우리가 결코 이름 붙일 수 없었으나 이름 지어진 세계들의 영역에 대한 고민이 컸기 때문이다. 시작은 이렇게 했으나 어느 순간, 문학 속에서 이 분절들이 허물어질 것이란 기대를 하게 된다. 물론 이 역시 세계의 극히 일부일테고 또 이런 식으로 관념 속 세계는 재편될테지만 그 재편된 세계로 인해 보다 넓게 많이 고민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도 함께.

☞ 더 읽기 : 첫 번째 모임 - 메타버스 세계에서 열린 독서 모임(H 님의 브런치)

『단풍은 락엽이 아니다』, 리희찬

※ 책 정보 : 『단풍은 락엽이 아니다』, 리희찬(도서출판 아시아)

북한어(문화어?)로 된 책은 처음 읽었다. 일제시대나 전후 즈음해서의 근현대 문학은 어느 정도 학창 시절 접했던 적이 있지만 그 이후 이념과 분단이 한참이 지난 시대의 (상투적 표현이지만서도) 가깝고도 먼 나라의 문학을 접한 적 없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진기한 경험인지도 모르겠다.

몇 가지 짚자면, 정식 출간된 책임.(불법 아님) 한국식 표준어로 번안된 책이 아님.(음성 지원되고 생소한 말들은 괄호 속에 편집자주로 설명이 달려있지만 설명이 없다 해도 맥락이나 의미 이해가 문제되지 않을 정도) 2016년 작, 꽤 최근의 소설이다.

동일 언어를 사용하는 해외 국가가 없는 고로(한국에서는 북한을 공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음) 동일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나라들의 언어에 대해서 궁금해했던 적이 있는데, 이 책은 뭔가 그런 느낌을 제공하기도 했다.

특히 수도권에서 태어나 표준어에 가까운 말을 사용하는 사람으로(그게 일부 서울 사투리일지언정) 사용하는 언어를 돌아보거나 거리를 두며 생각할 일이 거의 없었다. 머리로는 당연히 한국어에서 표준어의 언어 권력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걸 체감할 일이 없었는데 북한어로 된 책을 읽으면서 서울 경기 지방의 말이 어떻게 들릴 것이며 어느 지점에서 이상하게 여겨질까에 의문을 가지게 되기도 하였다.

책은 굉장히 잘 읽힌다. 장면이나 인물, 사건이 변화하는 것들을 보면 현대 소설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듯하면서도 사실상 성찰적 깊이보다는 어떤 정해진 룰(?)이 있기 때문에 그런 계도적 측면에서 오히려 수월하게 읽힐 수도 있다고도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일반인들의 면면을 알 수 없는 입장에서, 흐름과 맥락 파악은 어렵지 않았으나 구체적인 상황이나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마치 눈을 감고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안개 속을 걷는 듯이 느껴지기도 했다.

동시에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지라 계급화나 교육에 대한 열의 같은 측면은 동질성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지배인 동지' 같은 이중성을 띈 표현 같은 것에서는 북한에 가지고 있던 어떤 관념에 대한 이질성이 느껴질 정도였다.

오늘 모임에서는, 김정은 체제 이후로 어느 정도 자본주의적인 면들이 알게 모르게 이전보다 허용된 면들, 또 여기에 등장하는 남녀 캐릭터와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여성의 지위, 피라미드 형식으로 자식 → 부모(또는 남녀) → 가정 → 사회 → 국가로 이어지는 계급 구조 속에서 어찌보면 공동체적으로, 다른 면에서는 파놉티콘 구조로 감시망이 구축되어 있는 세계에 대한 약간의 소름도 함께... 이야기 나누어보았다.

한편 아쉬운 점은 역시나 북한의 실상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가까운 미래에 있지 않을 것이며, 또 이런 이해 내지는 오해가 전부일 거라는 것. 다른 작가의 「벚」이라는 88년 작은 해외 수상도 하고 번역도 많이 되었다던데 그런 작품들도 궁금해진다.

이 외 북한어에서 마주한 재밌는 표현들, 놀새(한량), 발편잠(이건 마치 우리나라의 줄임말 같았다.), 무엇무엇이 번지다와 같은 문학적 표현처럼 느껴지나 실제 은유적 표현인지 일상어인지 모를 어떤 표현들도 인상 깊었고

몇 차례 등장하는 대동강 맥주는 정말 마셔보고 싶었다. 정말 한때 대동강 맥주가 반입되는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아쉽게도 나는 그 기회를 놓쳐버렸고 아직도 못 마셔봄.. 솔잎주, 이런 것도 굉장히 궁금했고, 량주(양주)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 사람들이 자본주의 국가의 량주를 마실 것 같지는 않고, 무슨 량주를 마실까, 러시아 산 보드카일까, 하는 궁금증들이......

☞ 더 읽기 : 두 번째 모임 - 북한 문학 읽기는 합법이었습니다(H 님의 브런치)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샤힌 아크타르

※ 책 정보 :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샤힌 아크타르(전승희,파르하나 라흐만 샤시 역, 도서출판 아시아)

읽는 내내 고되었다. 역사에 기반한 소설이냐 내면을 파헤치냐 하는 취향을 떠나 역사적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 속에서 현실과 직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껏 그런 소설들을 일부러 피해왔다. 한 켠에 죄책감을 마련해두고 이런 책들을 지나칠 때마다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으로 쳐다만 보다가 끝내 집어 들지 못하곤 했다.

방글라데시는 내게는 데이터가 1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다. 수도가 다카라는 것도 이 책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제1세계 국가들의 수도를 모를 때의 무식함에 대한 지탄과; 그것으로 움츠러드는 창피함까지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쩌면 이 암전 같은 지역들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데에 얼마나 당당해왔던가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불균형은 여기서 시작된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다는 어떤 기저의 인식.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정확이 이 궤적을 담지한 채 나아간다.

때는 바야흐로 1971년, 소설로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파키스탄이 당시 동파키스탄이었던 방글라데시를 침공한다.(놀라운 점, 이 두 나라는 붙어 있는 나라가 아니다. 인도를 사이에 두고 있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이에 맞서 독립 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제부터 마주하게 되는 것은, 전쟁의 일반적인 참상도 물론 있지만, 주인공인 마리암의 일생이 어떻게 낙인 찍혀지고 철저하게 배제되는가,이다. 폭력은, 그리고 특히 전쟁은 참담하고 비극적이다. 하지만 그 참담함과 비극적인 서사 중에서도 부차적으로 미루어지는 그런 삶들이 있다.

비랑가나, 말하자면 '전쟁 영웅', 다른 표현으로 전쟁 중 위안부 피해자들을 이른다. 하지만 '전쟁 영웅'이라는 언어는 명목일 뿐, 사람들은 이들에게 비랑가나, 라는 잔인한 낙인을 찍으며, 그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구경을 하러 오기까지 한다.

참전으로 순국한 사람들, 자의가 아니라 폭력성 속에 휩쓸려 위안부 피해자가 된 사람들 모두, 희생되고 피해자가 되었지만, 전자에게는 특별한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고, 다시 한 번 언급할 필요성이 없는 '실제'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랑가나'란 무엇일까. 이는 그들이 사실은 전쟁 영웅이 아니라는 가장 결정적 증거인 명명이며, 도구로서의 여성적 삶이 끝났다는 사회적 낙인일 뿐이다.

그리고 그 주변의 사람들은 이 정상성의 범주, 그러니까 여성으로서의 삶의 가치를 잃어버렸다고 여겨지는 주인공에 대해 죽음, 또는 다시금 정상성(결혼과 잉태)으로의 편입을 강요한다.

전쟁 전, 전쟁 중, 전쟁 후, 그 어느때이고 주인공인 마리암의 삶은 결코 인간이었던 적이 없다. 그리고 '전쟁 영웅'이라 굳이 굳이 명하면서도 비랑가나들의 삶이 진보와 독립, 그 어느 가치를 추구하는 어느 진영에서건 고려된 적이 없다. 그들은 명목상 영웅일 뿐, 폐기된 존재, 수치스러운 무엇일 뿐이라, 독립의 그 어느 순간에서도, 독립 후의 사회주의 진영과 친미 진영 사이에서도 늘 배제되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전쟁 전에는 독립 운동에 열성적인 남성의 위안으로, 전쟁 중에는 전리품으로, 전쟁 후에는 늙고, 소위 '창녀'로 인식되게 된, 그런 시선 속에서 살아간다. 대체 인류는 어디까지를 포함하는가. 진보와 독립이라는 대의적 가치 속에 여성은 늘상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이 작품에서는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환멸)

도구로서의 육체, 더이상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결론 내린 아버지의 재혼, 가정에서 자녀인 남매를 잃었을 때의 그 극명한 차이, 군사주의와 강간문화, 나이 든 여성의 쓸모없음까지.

감히 말하건데, 이것이 꼭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비극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충분히 괴롭고 거슬리고 힘들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런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책은 이 외에도 페미니즘 담론의 많은 부분들을 건드리고 있다. 위에 언급한 이슈 외에도 피해자다움의 정체성, 자본주의, 성매매, 동성애 등등.

괴로웠다. 중간에 포기할까 고민도 많이 했다.(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트라우마 있으신 분들은 고려해서 읽으시길. 하지만 다 읽고 후회하지 않았다. 결코.) 모임에서 말씀해주셨듯, 우리가 어쩌면 어떠한 것, 특히 전쟁이라든가 하는 역사에 접근해야 한다면 숫자나 데이터가 아닌 서사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상자가 몇 명이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사실보다 때로는 한 사람의 고통과 인생으로의 접근이 사건에 대한 어떤 여파와 잔상들을 더 인간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책을 재미로 읽거나 수집의 취미와 용도로 사람들도 많겠지만 내겐 그렇다. 책을 읽어서 사람이 조금이라도 변화할 수 없다면, 그냥 수집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어쩌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인사이트나 타인의 고통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가 충분히 기득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오늘 모임에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책을 읽지 않아서, 그렇게 주변 사람들과 깊이 있게 감정을 나누지 못해서일지도.

좋아하는 책은 많지만, 평소에 타인에게 추천하는 일은 거의 없다. 사람의 가치관과 취향과 상황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충분히 논의된 상태에서는 가볍게 권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정말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많이 조명받지 못한 것 같다. 실상, 정보 전달의 차원에서 이러 이러한 차별이 있어요, 보다는 때로는 보여주면서 얼마나 여성의 몸이 하나의 고깃덩이로 전락해오고 인식되어 왔는가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그리고 그 낙인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보여주기 때문에, H님의 말씀을 빌자면 글로라도 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더 읽기 : 세 번째 모임_방글라데시 전쟁 역사와 위안부(H 님의 브런치)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이 반 외 베트남 작가 다수의 단편선집

※ 책 정보 : 『그럴 수도 아닐 수도』 - 베트남 작가 6인 소설집, 바오 닌 외(하재홍 외 역, 도서출판 아시아)

보이지 않는 세계들을 시작하며 『물결의 비밀』이라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단편을 번역한 책을 읽었을 때, 그 때가 베트남 작품과 처음 조우한 때였다. 북클럽 소개글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것도 베트남이었고, 패키지 몇 박 며칠 다녀오고 다 아는 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책의 머리말에서 이미 공감이 됐는데, 실제 인간들의 삶의 터전인 곳을, 단지 맛집, 액티비티, 마사지, 어쩌고 저쩌고로만 소비하고서는 다 아는 듯이 말하는 것에 아연실색할 때가 많다. 그런 취지에서 처음 모임을 기획했을 때의 마음과 꼭 같은 점부터 기대가 되었고, 그리하여 알 수 없었던, 아직 새겨지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닿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고 말이다.

내가 실제로 겪었던 베트남의 모습들이 영영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면, 읽으면서는 놀랍도록 우리의 혼령에 대한 인식과 유사한 내용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처럼, 여기 선집의 작가들이 대부분 50-60년대 생으로 전쟁의 참상에 대해 그 상흔이 남아, 문학에도 드러나 있었는데, 특히 이 지점에서 혼령과 영혼이 가까운 누군가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든가, 혹은 어딘가 언젠가 먼저 간 혼에게 잘 부탁한다든가, 하는 토속적 믿음이 굉장히 친숙하게 느껴졌다.

수록된 총 9편의 단편 중에서도 책 제목이 된 「그럴 수도 아닐 수도」가 가장 좋았고, 「이승의 길」 역시 기억에 많이 남는 작품이었다. 두 편이 가장 긴 단편이었는데, 책을 오랜만에 읽는다는 두려움에도 두 편은 가장 좋고 또 훌훌 읽히고 재미도 있고 좋기도 좋았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는 이 반 이라는 작가 작품으로 전문직 여성이 아내가 어쩌다 보니 집안의 온 제사를 등에 지고 살다가 30이 넘어서도 결혼하지 않는 딸과 훌쩍 여행을 떠나더니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내는 내용인데, 마지막 즈음의 문장이 너무 좋았다.

오랜 시간 동안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거짓말이 쌓아올린 퇴적물 위에 온갖 미사여구들이 넘쳐나는 이런 사회에 속해 있는 가족, 그게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과 믿음이 더 이상 남아 있기는 할까?(131)

ㅡ 『그럴 수도 아닐 수도』, 바오 닌 외(하재홍,김주영 역, 도서출판 아시아)

관습에 매이다 보면 언젠가 의미는 사라지고 의식만 남는 것처럼, 이 역시 많은 면에서 공감이 갔고..

투이 즈엉의 「이승의 길」에서는 다음의 부분이 가장 좋았는데,

아무것도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투언 영감은 속으로 자기 때문이라고, 그 고엽제 때문에 자기 딸이 이 지경이 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참지 못한 영감은 구석에 주저앉아, 덩치 큰 사위가 애타게 들락날락하며 흰 가운 입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붙들고 귀엽게 이 말 저 말 섞인 베트남어로 묻는 모습을 줄곧 바라보았다. 영감은 그를 증오하겠다고 생각했었으나 갑자기 마음속에서 모든 것들이 문득 풀어져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는 그는 갑자기 애처로움을 느꼈다.(88)

ㅡ 『그럴 수도 아닐 수도』, 바오 닌 외(하재홍,김주영 역, 도서출판 아시아)

이런 부분들. 하지만 서사 속에 결말들이 의미가 다르게 마련이고.. 그러면서도 가타부타 어설프게 설명하기 보다는 모두 한 번 쯤 읽으면 좋을 소설들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다.

아시아 세션에 작품들마다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었는데, 발견이라 할만큼 의미있는 작품들이 많아서 보이지 않던 세계들을 정말 발굴한 기분마저 든다. 모임에 도서출판 아시아 책을 많이 넣었는데 이 역시 발견이라면 커다란 발견이다. 여성 작가 안배도!

단,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해설이나 문장의 매끄러움 같은 것들. 역자의 머리말을 보면 베트남 언어 자체가 많이 달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싶은 게, 시제가 명확하지 않은 편이라고 머리말의 글을 기억한다. 해서 편집자가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생각해보면 또 베트남 문화와 언어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편집자를 구하기도 어렵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분 부분 이해 못한 것들에 대해선 노랑 님께 여쭤보았다... 가뜩이나 후기 찾기도 어려운 책들이라 노랑 님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 더 읽기 : 네 번째 모임 - !결석! 혼자 읽은 베트남 단편선(H 님의 브런치)

『델리』, 쿠쉬완트 싱

※ 책 정보 : 『델리』, 쿠쉬완트 싱(황보석 역, 도서출판 아시아)

개인적 독서 역사에서 여러 진기록을 세운 책이었다. 1. 첫 인도 장편 소설 2. 처음으로 음성으로 '들은' 책 3. 모임하면서 처음으로 중도 포기한 문학책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을 처음에 선정했다가 488쪽에 주저하다가 고른 책인데 『델리』는 무려 600페이지에 육박한다. 그럼에도 끌렸던 이유는 해학성, 대중성, 선정성(...) 등등에 끌렸고 결국... H 님의 말씀처럼, 그리고 저 개인적 진기록이 증명하듯, 이 책은 나에게도 역시 시련이었다.

소설은 델리와 바그마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보잘 것이 없고 적나라하지만 그것이 매력이라는 둥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인도인인 화자부터 공항에서 돈을 뜯긴다. 그렇게 시작하는 소설은 비교적 현대의 상황인 화자의 이야기와 인도의 어느 시점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양성구유인, 그러나 여성 혹은 그보다 못한 어떤 부류로 취급되는 바그마티와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늘어놓는 화자와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낸 이 형식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내 경우는 경계의 인간인 바그마티를 내세우면서 다중의 종교적 형식이나 젠더적 경계에 있는 어떤 상황을 그려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노랑님의 말씀처럼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바로는 왕에서 민중으로 옮겨가는 어떤 의도가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완독을 결심하기도 했다.

중간에 삽입된 이야기들은, 핵심적인 것 같으면서도 끊임없이 내게 갈 길을 잃게 하곤 했다. 갑자기 바뀌는 화자, 도저히 감 조차 잡을 수 없는 생소한 이름들과(H 님 말씀처럼 이 이름들은 성별, 종교, 특질 등등을 유추하기엔 내게 너무 생소했다.) 역사적으로 너무나 무지한 어떤 진입장벽들이 그랬다. 거기에다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라든가, 지금까지 어떤 특정 사건을 배경으로 한 아시아 문학들의 혹은 익숙해져왔던 문학과는 다르게 특정 사건도, 연도도 아닌 옛 이야기 형식을 빌어 전개되는, 사실은 읽다보면 엄청 웃긴 문장들로 가득한 이 책을, 나는 재미로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무언가를 발견하려 했고, 알면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라고 해야 하려나.

무언가를 알고 웃고 이해하기엔 '시크교' 조차 낯선 내게는 뭐 그런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선영님의 말씀처럼 일전에 『물결의 비밀』을 읽으면서 그나마 친숙하게 했던 작품 「곡소리」를 장례식 장면마다 떠올렸다.

양성구유, 남색과 같은 이야기들이 마치 금기처럼 그러나 자주 등장한다. 이런 등장들은 멸시당하는 와중에 그 경계를 흐리기 때문에 그나마 덜 불편했던 지점이다. 완전한 남성, 완전한 여성만 등장하는 작품들은 경계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를 삭제함으로써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그러나 이런 등장은 경계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고 역겨운 중에서도 그런 경계를 지우는 존재들이 이 역겨움을 흐린다고 해야 하나.

인도의 이야기를 읽으며 주인공들을 따라 펼쳐지는 광경을 상상했다. 감히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곳들을. 문득 페르시아를 가면 어떨까, 세스 노터봄의 『이스파한에서의 하룻저녁』을 떠올렸다. 페르세폴리스를 가면 어떨까를 다시 상상했다. 거대한 폐허가 광영하게 있을 곳.

새삼 세상이 무척 넓고 내가 보는 세계는 무척 좁다는 것을 체감한다. 이는 분명 체감이다. 왜냐하면 관념 속 내 세계관은 도식화되고 도시화된 도처의 직각과 선형적인 구조와 논리에 의한 세계인데 정작 세계는 그렇지 않은 곳들이 지리적으로는 더욱 광범위할테니까, 라는 생각들을 하며..

다 읽지 못한 채, 이런 것들을 왈가 왈부할 수 있을까도 싶고, 이런 데에는 모임원들의 도움이 매우 컸다.

☞ 더 읽기 : 다섯 번째 모임 - 델리의 모든 얼굴(H 님의 브런치)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함카

※ 책 정보 :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함카(조영수 기획, 배동선 역, 한세예스24문화재단)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아시아, 특히 동남아시아 문학의 출간 자체가 대단한 일인데다 인도네시아 문학은 처음인데 한국에 출간된 인도네시아 문학 자체가 있나 싶어서, 이렇게 해야 하나 싶으면서도 사실 좀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리뷰나 후기 없는 책을 읽는 것은, 즐거운 길일 수도 험지일 수도 있는 길을 지도 없이 걸어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들의 첫 세션인 아시아 문학은 더더욱 그런 느낌이 강했다. 다행히도 이전의 책들이 결코 쉽지 않다 하더라도 때로는 미풍으로, 때로는 거센 괴로움으로, 미지의 곳들을 차분히 밟아가는 기분이었다면, 마지막 책은, 여지껏 밟아온 익숙한, 그렇지만; 비포장 도로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너무 익숙한데 커다란 돌부리에 너무 자주 걸려;;

말인즉.. 원형적 서사를 그대로 간직한, 그것들을 답습한 평면적 서사였다고 해야할까.. 북클럽에 함께 해주시고 계신 모든 분들에게 큰 죄를 지은 그런 기분인데다 나부터 읽는 내내 현타가; 뭐.. 그럼에도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처럼 끝까지 재밌게(?)는 봤다.

그러나 쓰여진 시대와 작가의 연배를 감안한다면 아체님 말씀처럼,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기는 했고, 인도네시아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라 폐쇄성을 볼 수 있다는 점, 물과 관련된 묘사가 많았다는 점은 수긍이 가기도 하는 한편, 남주인공과 혼연일체 된 듯한 작가의 자의식이 불거져 나오다가도 하디자나 등등의 말을 통해 나오는 간혹 있는 정신이 온전한 말들(...)은 이 책을 여하간 끝까지 읽게 해주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또 감사하게도 이런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좋아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책들의 좋음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위안을 삼아보고자...

☞ 더 읽기 : 여섯 번째 모임 - 나는 맞았고 너는 틀렸다?(H 님의 브런치)

아시아 문학 세션을 마치며

아시아 세션이 끝났다. 그리고 6작품은 정말 한계가 많다고도 생각한다. 물론 그럼에도 나 역시도 완독을 못하고 넘어간 작품도 있고. 하지만 이 모임이 아니었다면 영영 마주할 일 없었을 세계의 단면들을 가깝고도 또 멀리, 다르다 느끼면서도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또 이 낯선 길을 한 발 한 발 발 맞추어 든든한 동지가 되어준 모든 모임원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

느리지만 차곡이 밟아가고 싶다고 아체님과 말씀을 나누었다. 지치지 않게 조금씩. 아시아 세션을 하는 사이 어느덧 계절이 바뀌었다. 장마가 오고, 더위가 올 것이다. 다음 세션을 위해 한 달을 통으로 쉬기로 했다. 다음 세션은 중남미 문학이다.

☞ 더 읽기 : 아시아 문학 세션 닫기(H 님의 브런치)


남미 문학

2022. 08. 21 ~ 2022. 11. 27.

중남미 문학에 대해서는 덕심을 내비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접한 작품이라고 해 봐야 아르헨티나나 멕시코 문학의 일부로 그 모든 지역적 범위를 포괄할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한 것일 테지만. 텍스트만으로도 세계를 확장하는 보르헤스의 기이함과 그런 보르헤스의 기원이자 스승이라 할 만한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와 3차원의 영상에 자신을 기입하는 아돌포 비오이 까사레스, 마치 멕시코의 카프카를 방불케했던 후안 호세 아레올라,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일찍이 접했던 서유럽권 책들이 양적으로 보나 접근성에서 보나 압도적이었기에, 또 휘청이던 시절(아직도 휘정이기는 하지만;) 그 내면의 구구절절은 너무나 적합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좋았고 마음에 닿았으나 그런만큼 지지부진과 진부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어째서 20세기의 서유럽 인간에게 이렇게 공감을 하는 것인가.

세상의 지극히 단면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보르헤스를 처음 읽었을 때였던 것 같다. 이전의 독서의 세계란 공감과 자기 복제의 반복이라고 한다면 보르헤스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문 같았다. (잘은 모르지만) 나보코프의 말을 인용해보도록 하자.

"보르헤스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으나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

남미 문학 세션을 시작하는 기대의 마음은 아무래도 위와 같을 것이다. 사실 가장 기대하는 세션이기도 했고. 이렇듯 (이제는 닳고 닳아버린)기존 서사의 죽음, 그리고 이어지는 내면의 묘사에서 형이상학의 새지평을 여는 듯한 새로운 세계에 함께 발을 들여보자는 그런 심정.!

왜 중남미에서 남미 문학으로 바뀌었나. 중남미로 하니까 추리고 추린 것이 12권이나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아쉽지만, 중미는 나중으로 기약하고.. 추리고 추린 8권을 선정했다. 물론, 여기에도 아쉬움이 많다. 읽고 싶은 작품들, 좋은 작품들이 많지만 아쉬움은 일단 접어 놓고 선정한 것부터 열심히 꾸준히 읽어보는 것으로..

▷ 함께 한 분들 : 노랑 님, 대욱 님, 소희 님, 중훈 님, 혁중

☞ 더 읽기 : 중남미 문학 세션 초대장(H 님의 브런치)

『탱고』,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선

※ 책 정보 : 『탱고』 -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선, 루이사 발렌수엘라 외(송병선 역, 문학과지성사)

읽은 지 오래지 않은 것 같아 이미 인스타에 기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2년 전 9월에 읽었다. 해서 인스타에는 기록이 따로 없고, 기억도 가물가물하여 이번 기회에 다시 읽었는데 감회가 새롭다. 의외로 기억은 꽤 났지만 새롭게 느껴지는 작품들도 있었고, 플래그를 붙여놓은 지난 독서의 흔적을 보며 읽으려니 그때와 달라진 생각의 지점들이 재밌기도 했다. 이래서 재독을 하는구나. 한 번 읽기도 어려워 허겁지겁 새로운 책을 찾아 나서기 바쁜 나에게도 조금 새로운 이정표의 책으로 남을 것 같다. 동시에 이 책은 첫 번째 읽기의 기억도 강렬하여 여러모로 여러 감상이 드는 책이 될 것 같다.

책을 처음 읽게 된 계기는 아무래도 보르헤스의 영향이 매우 컸고(하지만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중 보르헤스 작품은 없다) 보르헤스 단편에 여러 차례 언급되었던 아돌포 비오이 까사레스나 실비나 오캄포, 그리고 바벨의 도서관 선집에 있던 훌리오 꼬르따사르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록된 작품들을 읽으며 남미 문학에 대한 어떤 전반적 인상을 가지게 되기도 했고 또 눈에 띄는 작품들로 새로이 궁금해진 작가들도 있다.(하지만 아직 번역이 된 게 없거나 절판이 많아 당분간 읽을 순 없을 듯) 더불어 이번엔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그 기대 이상의) 풍부함과 다채로운 해석과 느낌을 나눌 수 있어서 더 즐거운 독서의 경험이었던 듯.

단편을 하나 하나 나열하는 것보다 가장 좋았던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쓰는 게 나을 것 같아 그 방법을 택한다. 예전이나 이번에 읽을 때나 가장 좋았던 것은 후안 호세 아레올라(멕시코)의 「역무원」,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우루과이)의 「틈새」, 로사리오 까스떼야노스(멕시코)의 「요리 강습」이었는데 이 마저도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역무원」이란 작품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이 짧디 짧은 한 작품에서 카프카의 느낌을 받았었다. 계속되는 지연, 도착지와 체계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관, 그 안에서도 무언가를 찾으려는 인물, 그리고 어슴푸레한 느낌을 주었던 배경까지 우스꽝스럽게 돌아가는 삶의 비유인 것 같다가도 그게 너무 암담하고 어둡게 느껴졌던 것 같은데 이번 모임에서 H 님은 너무나 현실적이라고 하신 말씀에, 남미에 가 본 적 없는 나로서는 놀랍기도 했는데, 있지만 없고 목적지로 향할 순 있지만 생각하던 것과 다른 그런 지점들을 이야기 해 주시니 「역무원」의 비유는 어쩌면 은유가 아니라 보다 직접적인 비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이런 (누군가에겐 비현실과 은유였을)'현실성'은 다시금 '중국식 백과사전'을 떠올리게 하고 이를 언급하며 장소 위의 장소를 언급했던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를 상기시킨다. 더불어, 작가가 택한 도착지 T, 어쩌다 생긴 정착지 F, 결국 우연하게도 마주한 기차의 목적지가 X였는데 이런 이니셜 선정에 대한 H 님의 지적 역시 흥미로웠던 나눔. HJ 님은 김성중의 단편 「국경시장」을 함께 소개해주시기도 했는데 작품 내 언급된 F 마을이 생겨난 유래(?)와 유사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이야기 들으며 호기심이 동했다. DW님은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전개 방식과 같이 있는 듯 없는 듯한 이야기들의 혼재와 한 자리에 오래 있으며 여러 여행객들을 만나는 역무원 캐릭터와 쿠빌라이 칸에게 여러 도시들의 이야기를 해 주는 마르코 폴로의 유사성을 말씀하시기도 했는데 이어 JH 님 역시 같은 작품을 떠올리셨다고. 모임 초반에 이 작품은 마그리트 느낌도 난다고 하셨는데 공감된다.(그리고 모임 이름을 따온 작품이 언급되어 신났었습니다..ㅎㅎ)

한 뭉텅이(?)의 지역의 단편들을 읽는 것은, H 님 말씀처럼 일관성이 있는 한편 다양성을 느낄 수 있는 계기라고도 생각하는데 혼자 튀는 작품들이 있다는 분들의 말씀에 공감도 되고, 아무래도 지역적 역사적 색채가 또 다르다 보니 어렴풋한 그 느낌들을 이야기 나누며 보다 선명해지는 경험이 되기도 한 것 같다. 해서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지난 감상을 가져와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탱고』를 읽으며 들었던 남미 문학에 대한 소회.

'무엇보다 라틴 문학의 흥미로운 점은, 흔해빠진 표현으로는 마술적 사실주의?일 수도 있겠지만, 현실 세계에 끼워넣어진 것 같은 있을 법한 환상들과 직선적 시간 구성이 아닌 순환적이거나 역행하는 구조, 그러한 서술들이 품고 있는 새로운 관점 등인 것 같다. 짧지만 강렬하고 매혹적이다. 그리고 그 단편들을 관통하는 전체론적 세계관이 아름답다고 해야 하나.. 유럽 문학이 내면 독백에 가깝고 서사가 없지만 문장들이 매력적인 데 비해, 그리고 기존의 서사들이 굉장히 특에 박힌 것에 비해, 라틴 문학은 문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또 제시하며 문학이 가야할 길을 마련하는 듯 하다.'

덧. 근데 정말 애드거 앨런 포의 영향이 상당히 눈에 띈다.

☞ 더 읽기 : 무한한 해석의 장,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선 『탱고』(H 님의 브런치)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책 정보 :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황병하 역, 민음사)/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송병선 역, 민음사)

매번 당일 날 쓰다가 처음으로 일주일만에 쓰는 보이지 않는 세계들 남미 문학 세션 『픽션들』 후기.

왜 이런고 하니 아마도 보르헤스 덕후라서 그런 게 아닌가 한다. 역설적으로 잘 읽고 싶고 잘 쓰고 싶으면 영원히 미루다가 한 줌도 되지 않는 기억의 저편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게 마련, 더 흩어지기 전에 뒤늦게 갈무리 해 보려고 한다.

근데 사실 다 못 읽었었다.;; 읽었던 책이라는 것에 대한 심적 여유, 그러나 그런 심적 여유에 걸맞지 않는 심도 있는 작품의 연속이라 문장과 단어 하나 하나를 허투루 넘길 수 없었고,, 근데 또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2시간을 꽉 채워 했지만 두 편의 단편을 다루는 데에 그쳐 다행 아닌 다행(?)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다 나누지 못한 아쉬움은 연말에 번외로 더 진행해보기로.

그 두 편의 단편이란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티우스」와 「삐에르 메나르, 돈 키호테의 저자」였지만 실상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재밌게 들었던 이야기 위주로 서술 예정.

ㅡ 인식론과 유명론에서 출발하여 실체론을 거부하고 보편없이 존재할 수 있는가, 결국 인간을 표상하는 것만 인식할 수 있다는 지점을 착안, '틀뢴'에서 사용되는 언어, 즉 명사 중심의 언어가 아닌 세계관에서 유물론을 어떤 방식으로 거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납득 가능한 사유가 인상 깊으셨다고 하셨던 중훈 님 말씀도 재밌었고, 특히, 작품 내 틀뢴의 언어 체계가 명사가 부재한 것, 논증과 논리에는 인과, 그리고 그 이전에는 주술이 중요한데 그 결정적 명사가 없음에서 출발하는 언어 체계를 생각해보는 것에 이어,

현재는 언어가 사고관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 익숙해졌지만 언어로 세계관이 구축된다는 점을 담지하는 작품이며 이것의 현대 버전이 테드 창의 『컨택트』가 아닐까와 동시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비롯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인과성이 아닌 사건의 인과성을 언급해주신 혁중 님 말씀도 무척 재밌게 들었다.(재밌게 들은 것에 비해 그닥 많이 이해는 하지 못하여 정확하지 않게 적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주지한다) 카를로 로벨리의 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도 다시 도전해 볼 동기 부여를,,

H 님의 판본 이야기도 너무나 좋았는데,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총량을 백과사전으로 빗대어 우크바르에 대한 항목이 있던 해적판 백과사전처럼, 동시대를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서로 다른 판본을 가지고 있는 듯이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이 정말 진실한 것이냐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것과 동시에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언어를 습득하며 그 언어들 너머의 세계관을 엿보았던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하는 내용도 기억에 남는다.

ㅡ 작품 외적인 부분에서 대욱 님께서 말씀하신 태도에 대한 이야기도 공감이 가고 기억에 남는데, 지식과 언어의 변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관이 허무하거나 쉬운 비관이 아니라 지금에 오히려 최선인 태도, 그리고 지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자의식이 느껴지지 않은 점이 좋았다고 하셨는데 이 부분은 특히 너무나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왜냐면 가끔 자기증명하려는 자의식 가득 담긴 글들은 좀 피로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보르헤스 글은 그런 게 없다. 담백하고 담담한 서술.

작품의 깊이감만큼, 또 참여하신 분들의 관심의 방향과 삶이 다양한 만큼 이야기 나눈 내용이 더 풍성한 보르헤스로 사유할 수 있게 해준 것 같아 재밌었다. 더욱이 게시글에 담지 못한 「삐에르 메나르, 돈 키호테의 저자」의 메인 주제와 같이 작품은 독자의 재서술이며, 왜인지 이번 모임으로 보르헤스를 각자의 버전으로 다시 쓴 이야기들을 들은 것 같아 굉장히 의미있게 여겨졌다.

☞ 더 읽기 : 선을 면으로 - 경계 확장하기, 보르헤스의 『픽션들』(H 님의 브런치)

『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 책 정보 : 『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우석균 역, 열린책들)

전반적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지만은 굳이 따지자면, 책을 읽지 않는 사람 이상으로 책 읽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는 편이다. 전자는 어느 정도를 감안한다 하지만, 문화 예술 계통, 혹은 책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사람인지라 혹은 그만큼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기에 솔직히 말하면 소위 예술한다 자처하는 분들에게 이상한 동경을 갖지 말았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이 있다.

그리고 볼라뇨는 이런 느낌적 느낌이 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문학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최적화된 작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약간 발작버튼 눌린 듯. 『아메리카 나치문학』을 읽으며 어렴풋했던 모두까기의 정수를 『칠레의 밤』에서 비로소 더더욱이 발견하게 된 듯하다. 전자가 조금 더 직접적인데 비해 후자의 방식이 좀 더 세련된 듯.)

우선 책은 두 문단으로(이지만 실질적으로 한 문단;) 이루어져 있다. 문단의 행갈이가 거의 없음에도 재밌게 읽었다. 특히 피노체트가 책 얘기 하는 부분. 이 부분에서 화자에게 구구절절 늘어놓는 거의 변명에 가까운 자기 항변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프기가 그지 없었는데 어느 순간 책이 교양의 메타포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재 모두가 작가이자 어쩌구인 시대를 살고 있다. 권위의 소멸을 지향하면서도 이런 분별없음이 과연 어떤지에 대해 계속 생각하지만 최근 고전을 읽으면 천재가 된다던 소위 '작가'의 계속되는 충격적 언행을 목격하면서는 이 경계없음의 시대에 분별이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군(?, 이 의미 없는 단어..!)인가 했던 사람들의 스러짐을 보며 한없이 환멸을 느끼던 차에 볼라뇨는 너무나 단비 같은 문장들을 내뿜고 있지 않은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나 혼자 썼소, 세 권을 말이오."

– 『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우석균 역, 열린책들)

라고 말하는 피노체트의 문제는 무엇인가. 실소를 터뜨지 않을 수 없는 대목들이다.(육성으로 웃음;) 그래,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음이 문제다, 썼음이 문제다, 세 권이나 쓴 것은 더욱 더 큰 죄악이다.

모임 말미, 중훈 님께서 이 작품이 볼라뇨 스스로 구성적 완벽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는 말씀하시며 이 작품이 그렇게 스스로에게 인지되는 부분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H 님께서 스페인에서 거의 살지 않았던 볼라뇨의 삶을 들어 어느 신념으로 사는 사람이든, 어떤 배경에 살고 있고, 어던 글을 쓰든, 글이란 신성하지 않고, 더불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시인이라고 했던만큼 자신감보단 겸손함에서 비롯된 말이 아닐까 하는 말씀도 놀랍고도 공감되었다. 특히 읽는 내내, 그 모두를 향한 비판에서 스스로도 배제시키지 않는 그런 면들이 좋았다. 더불어 명시적으로 쓰지 않은 점도. 대욱 님께서 말씀해주신 면은 읽으며 깊이 생각지 못한 부분인데 사제복이나 출신 자체가 굉장히 보호 받고 있는 계층임에도 그것 조차 망각하고 잇는 것의 아이러니, 그리고 이런 식자들의 위치에서 기록되고 전승될(마치 화자가 한 것처럼) 이야기들의 신뢰성과 누적에 다소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미에ㅡ 문맹이 아닌 사람, 기득권이 아닌 사람의 언어가 남미 문학에서 얼마나 반영이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까를로스 뿌엔테스의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읽으면서도 느꼈던, 이게 과연 어디까지 진실을 대변하는 텍스트인가, 하고 어딘지 찜찜했던 그런 면면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객관성이라는 그 허울..!, 그 존재하지도 않는 허울 속에 우리는 학문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 더 읽기 : 사르카즘X사르카즘,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H 님의 브런치)

『바다의 긴 꽃잎』, 이사벨 아옌데

※ 책 정보 : 『바다의 긴 꽃잎』, 이사벨 아옌데(권미선 역, 민음사)

지금까지 읽어 온 남미 문학들이 환상성과 관념적 세계관, 마술적 사실주의에 가까웠다면 이번에 읽은 이사벨 아옌데의 『바다의 긴 꽃잎』은 굉장히 구체적이고 사실성을 띈 작품이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을 시작으로 칠레로의 망명과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의 충격적인 무너짐, 그로 인한 베네수엘라로의 망명과 다시 칠레로 돌아오기까지의 일련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인물 중심의 이야기다.

만약 재미와 의미를 따진다면 책으로 재미를 찾지 않는다고 선언(?)했던 것이 무색하게, 재미있게 읽었다.(이런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읽어도 되는가에 대해 고민했지만서도) 더욱이 역사와 역사 소설이라면 기함을 하고 도망다니는 정도인데도 잘 읽혔다.

그도 그럴 것이 소희 님 말씀처럼 전개가 굉장히 빠른 것도 한 몫을 한 것 같고, 스페인 내전, 칠레 군사 쿠데타 등의 거대 서사를 다루면서도 인물 중심으로 소위 '사소'하게 여겨지는 개인적 삶과 고뇌를 다룬 점도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물론, 여기서도 전쟁의 참상과 망명의 피로 등이 전해진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참상과 피로를 인류로 퉁치지 않고 개개인, 특히 여성이 겪어왔던 그 오래된, 그러나 개인적이고 사소하다고 여겨져왔던 고통도 놓치지 않는다. 전쟁이나 망명 중의 (적군, 아군 할 것 없는) 성폭력과 가부장적 가문에서의 결혼과 혼전 임신, 그에 따른 감정의 변화들에 주목한 서술은 그동안 있어 왔던 수많은 전쟁을 다룬 소설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부분들까지 가시화한다.

이런 면에서 소희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숫자로 역사와 전쟁을 접하는 것 이상으로 이야기로 접하며 전달되는 부분들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점에 공감했고 그와 더불어 소희 님께서 준비하신 (사건이 일어난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사실 정리부터 추천 컨텐츠까지 담긴)ppt에 계속 물개 박수 침. 글 하단에 링크를 첨부한다.

또한 대욱 님 말씀처럼 사건 위주가 아니라 한 가족과 인물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구조와 깊이 있고 풍성하게 다룬 인물들의 감정에서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까,와 같은 정서와 세계관과 맞닿을 수 있는 점도 이 책의 강점으로 느껴졌다.

그런가 하면, 문장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을 느끼기엔 아쉬웠다는 소희 님 말씀도 동감한다. 소설이 서사성에 크게 기대어 있고 인물 중심으로 생생하게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남미 문학 세션에서 다뤄왔던 다른 소설들과는 결이 다른 느낌은 확실히 있었고, 소설 속 중심 인물들은 어쨌거나 일정 부분 이상의 기득권에 속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민중의 목소리가 부족했다는 인상 역시. 이어 중훈 님께서 말씀하신 민중 혐오라는 좌파가 가지는 고질적 모순은 계몽주의로 재차 드러나던 바.. 확실히 남미 문학 자체가 일정 수준 이상의 계급이 담보되는 작가들이 대부분인데 이 점은 계속해서 아쉬운 부분으로 남을 것 같다. 이를테면, 여기서 '마푸체족'이라 불리는 원주민 출신 작가는 우리가 아는 작가들에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더불어, 결말 역시 아쉬우셨다 하시는 소희 님 말씀도 이해가 되었고.. 흡입력이 계속 있다가 끝으로 갈수록 약간 텐션이 떨어지는 감은 있으나 대욱 님 말씀처럼 끝까지 읽었을 때의 감정도 (내 경우는) 나쁘지 않았다. 아쉬운 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문장이나 구조에서 오는 문학적 아름다움 보다는 다른 방식의 문학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는 대욱 님 말씀에도 공감을 했고, 아옌데 작품은 첫 작품인데 다른 남미 소설들과 다르게 구체성과 사실성을 띄어서 이질감을 느꼈었는데 또 대표작인 3부작(『영혼의 집』, 『운명의 딸』, 『세피아 빛 초상』)이 궁금하기도 하고. 『영혼의 집』은 마술적 사실주의 이야기가 책 소개에 언급되어 있어 꼭 읽어보고 싶었던,,

어느 새 남미 문학 세션도 중반부에 다다랐다.

☞ 더 읽기 : 사실 기반 상상의 한계, 아옌데의 『바다의 긴 꽃잎』(H 님의 브런치)

☞ 더 읽기 : 부록 : 『바다의 긴 꽃잎』 개인 조사 자료(H 님의 브런치)

『보이지 않는 삶』, 마르타 바탈랴

※ 책 정보 : 『보이지 않는 삶』, 마르타 바탈랴(김정아 역, 은행나무)

천성 때문일까. 평소와 다름 없이 이미 마음은 336시간 전(즉 2주 전)부터 책 읽기를 시작했으나 무거운 눈꺼풀과 끔찍한 게으름이 어제 새벽까지 책을 읽게끔 했다. 그러나 천성이란 게 있을까도 싶고 인간사 천성이 중한가, 싶으면서 이런 경우 대개는 책이 문제인 경우가 많다는 결론에 이른다.

『보이지 않는 삶』은 사실 책 제목 때문에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를 빼고 무리하게 목록에 집어 넣는 감이 있었다. 왜냐하면 북클럽 이름이랑 너무 결이 맞지 않을까 했어서. 브라질이나 남미 문학에 대한 이상한 오리엔탈리즘적(우연히?도 남미는 한국보다 동쪽에 있기도 하고, 하지만 대체 탈?유클리드의 세계인 3차원에서 더 동쪽이 서쪽이고 그런 것 아니겠나) 시각 때문이었는지 책은 아쉬운 점 투성이였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혹평에 혹평을 거듭하였는데.

그럼에도 울림을 준 부분은 있었으니 '무언가가 됐을 수도 있는 여성, 에우리지시 구스망' 이야기 중에서도 '에우리지시가 에우리지시가 아니기를 바라는 에우리지시의 일부'의 이야기가 그랬다.

실은, 에우리지시는 다른 여성들에 비하면 비교적 평탄하고 무언가 하려면 할 수도 있는 그런 환경의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어째서 이 주인공이 선택하는 삶이 아닌 침묵하는 삶을 택했는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되는 삶이 뭔가,를 고민하는 삶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이 될 수 없는 환경에 놓인 삶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고민 끝에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는 명확하거나 구체화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자신이 누구는 절대 될 수 없는지, 되고 싶지 않은지, 어떤 삶만큼은 절대로 살고 싶지 않은지는 선명해진다고도 생각한다. 후자의 삶을 꽤 오랜 시간 살아온 사람으로서 많은 부분 이해와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동시에 어떤 시스템이 유지되는 것은 실은 감시도 감시인데 친절함과 그럭저럭 살만함,이라는 슬픈 확신도 함께 들었다.

그러나 종국엔 고민하는 삶이란 결국 읽고 쓰는 삶이구나 하는 생각도.

밤 느즈막히까지 꾸벅 꾸벅 졸며 읽고 모임만 끝나면 실컷 자야지 했는데 막상 모임 끝나니까 초롱초롱해져 뜬 눈으로 한참을 누워 있다가 적는다.

겨울의 길목에 접어 드는 지금 모임도 후반부를 향해 가고 있다. 연말 모임은 직접 만나 중남미 음식이나 술을 함께 해 보기로.

☞ 더 읽기 : 집 안의 삶, 마르타 바탈랴 『보이지 않는 삶』(H 님의 브런치)

『군터의 겨울』, 후안 마누엘 마르꼬스

※ 책 정보 : 『군터의 겨울』, 후안 마누엘 마르꼬스(조구호 역, 알렙)

생각과 마음이 동나는 날들이다. 생각은 주로 일상의 분주함과 번잡스러움으로, 마음은 분노로 동이 나곤 하는데, 하필이면 이럴 때에 『군터의 겨울』을 만났다.

아마도 우리는 잘못된 시기에 만난 것 같다, 라고 하기엔 내가 이 책을 이해할 수 있기에는 너무 기다란 시간과 태평양을 넘는 공간의 허허로움이 가로막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말인즉 역대급 어려운 책이었다. 어떤 책은 조금만 읽어도 그 부분만큼은 이야기할 것이 있거나 적어도 완독을 했을 때 조금이라도,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기에, 반절 정도 읽느니 안 읽은 것과 똑같은 느낌이라, 기어코 기어코 다 읽었으나 다 읽어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단순히 포스트 모더니즘적이라서일까? 그러기엔 너무 관념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사실적이지도 않다. 독백과 화자의 불분명 속에서 미로를 겪었던 후안 룰포와는 또다른 느낌으로 누가 누군지 모를 어떤 독백들이 서사를 중간 중간 내지르고 역사와 정치적 이슈들이 가로지르는 남아메리카의 상황, 방대한 예술 작품들의 인용은 읽기의 길을 수도 없이 턱턱 막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알고 있었다면 매우 풍부하고 재미있고 깊었을 그런 문학.

이런 길잃음 속에서 길잡이가 되어준 소희 님과 노랑 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특히, 노랑 님이 다와다 요코를 언급하시며 말씀하신 엑소포니 문학 이야기도 재미있었고(듣고 보니 정치적 이유로 타국에 망명한 남미 작가들이 쓴 문학에서 자주 보이는 특징인 것도 같다), 소희 님이 말씀하신 스페인어적 특징과 번역 이야기도 흥미롭게 들었다. 다만, 내가 소화한 게 많지 않아 많이 옮기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

비록, 어려웠지만 빅토르 하라,처럼 이전 모임에서 읽었던 아는 이름들이 나올 때 어떤 느낌인지 파악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단, 작가의 이력이 사실 작품보다 인상적이었는데, 파라과이의 파시스트 독재 시절 저항하다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교수가 되었지만 파라과이 내 쿠데타 발발 소식을 듣고 조국으로 돌아가 이런 저런 활동을 하고 있다고. 파라과이 작가 작품도 처음. 아마 한국에 번역된 유일한 작품이지 않을까도 감히 추측해본다.

내내 어렵다 했지만 빛나는 문장들도 많았고, 해서 안에서 잘 갈무리 되지 못해 아쉬운대로 좋았던 문장이라도 옮겨 본다.

솔레닷은 자신이 문화적 'extablishment(체제)'라고 부르는 것, 즉 '예술가적 삶'의 작은 세계에 항상 반대했는데, 그 세계에서는 자화자찬, 말다툼, 찬사로 보상받는 찬사들이 진부한 창조와 빈약한 이데올로기적 구성물과 함께 가장 애처롭게 패배하고 말죠." 베로니까가 계속했다. "그 순간이 되자 솔레닷은 인간의 자유를 위해 다른 사람들과 얼굴을 맞댄 채 언어나 총을 사용하고 있었을 거예요. '우리 나라에서는 정말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혁명가가 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사랑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야'라고 솔레닷이 어느 날 내게 말했어요.(후략)(375)

ㅡ『군터의 겨울』, 후안 마누엘 마르꼬스(조구호 역, 알렙 2016)

이번 책이 역대급으로 어려웠기에 이것보다 어려운 소설은 한동안 만나기 어려울 것이란 용기를 가지고 다음 책을 맞기로 한다. 남미 문학 세션은 8회 중 이제 2회만을 남겨 두고 있다. 기획 단계에선 관념적 세계관과 지적 유희를 꿈꾸었지만 지금껏 봐 오고 기대했던 것 역시 극히 일부였다는 생각도 든다. 그 특유의 무언가가 있겠지만 보다 사실적이고 강인한 의지와 저항력 같은 걸 볼 때마다 또 새롭다.

☞ 더 읽기 :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피땀, 『군터의 겨울』(H 님의 브런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 책 정보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송병선 역, 문학동네)

매번 미리 미리 읽어야지를 머릿 속으로 생각하다가 특히 이번 남미 문학 세션에서는 그게 좀처럼 쉽지 않은 것이, 서술 방식부터 사람을 더듬거리게 만드는 그런 바이브가 있다.(변명) 이사벨 아옌데의 사실적 소설을 제외하면 형이상학적 사유의 소설화, 의식의 흐름인데 누구의 의식인지 모르겠는 흐름의 혼재, 의식과 장면의 구분되지 않은 교차, 와 같은 서술들이 그런 바이브를 자아내곤 한다. 바르가스 요사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는 다른 남미 문학에 비하면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장면과 장면의 교차가 도입부의 어지러움을 더했었다.

하지만 읽을수록, 결말부에 다다를수록 이런 장면의 교차와 병치가 대환장의 콜라보를 클라이막스까지 이르게 하는데, 그러고 보면 이런 방식의 서술은 포스트 모더니즘적이기 보다는 치밀한 장치처럼 보인다. 라고 쓰지만 실은 늘 그렇듯이 북클럽 모임원 분들의 이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모순적 인물, 모순적 상황,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실은 성과 군대,라는 키워드가 나오는 순간부터 사기가 떨어졌었다. 피하고 싶은 주제였기 때문이다. 여하간 아마존에 주둔 중인 군대로 인한 마을 여성들의 강간 피해 사건이 계속 생겨나자 비밀리에 군대에 성노동을 제공할 특별봉사대를 꾸리게 되는 주인공 판탈레온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비밀리에 꾸려진 이들의 존재(일명 판티랜드)는 삽시간에 소문이 나고 모두가 경멸하는 가운데 판탈레온 혼자만은 임무에 광적으로 진지한데... 소희 님 말씀처럼 생각하지 않고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이자 명예가 가장 중요한 남성상이자 대욱 님 말씀처럼 감투를 쓰자 이상해지는 인물, 자신의 위선이 소문나고 있음에도 충실하려는 모습 자체가 아이러니하면서 연극적이고 문제적 인물의 모순성, 그리고 노랑 님 말씀처럼 그럼에도 개인적 책임 뿐 아니라 시스템과 국가의 책임까지 닿아 있는 상황적인 모순의 혼재.

종교와 성 여기에 하나 더 혼란함을 더하는 것은 역시 종교이기도 하다. 노랑 님은 여러 가지 장치 중 왜 종교였을까,로 운을 떼어주셨는데 일반적으로 많은 소설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은유로 멸망 시기에 가까운 때의 성적 타락의 묘사가 등장하곤 하는데 여기서 종교의 등장은 어쩌면 이에 대한 심판이란 비유로 등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도 해주셨고, 소희 님은 중남미에 자리잡은 토속 신앙과 카톨릭의 융합이라는 지역 종교적 특색처럼 고립되어 있던 세계에 새로운 것이 들어오며 뒤섞이는 혼종을 보여주는 장치같으면서 고차원적 정신 활동이라 여겨지는 종교와 1차원적 욕구인 성욕이 어쩌면 떨어져있는 주제 같지만 광기로 이어졌을 때 이들을 병치해서 보여주는 지점이 재미있다고도 해주셨다.

결말에 관하여 : 결말은 어쩌면 뜻뜨미지근(?)하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고, 누군가는 소름돋는 죽음을 맞이했고, 책임자는 아무도 없으며,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런 점에서 많은 분들이 무섭다고... 대욱님 말마따나 주인공 판탈레온은 극도로 더운 곳에서 추운 곳으로 갔을 뿐이고, 그 간 그가 행한 모든 일을 만회하기 위해 더욱 '임무'에 충실할 것이고, 부대와 시스템은 여전히 자신들의 관점과 방식으로 해결하려 들 것이고,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은 해결되지 않은 채 반복될 것이란 말씀도, 소희 님 말씀처럼 이런 소설의 전개 방식 자체에서 작가가 정치적 인물이라는 것이 많이 드러났던 것 같고 결말이 스마트한 것 같다는 말씀에도 동의하면서, 한편, 노랑 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작가가 정치적 인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런 점이 무책임한 건 아닐지도 함께 생각해보게 되었다.

문학의 당사자성 : 그런가하면 혁중 님은 몰입할 수 없던 소설이라 하시며 당사자성을 말씀해주셨는데, 이 부분도 굉장히 공감되었던 부분. 어떤 사람에게 특히 정치적이고 마초적 스탠스를 가진 시선으로 이런 소재를 냉소적이고 블랙 코미디로 바라볼 자격이 과연 있을까,는 반드시 필요한 고민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공감했다. 어떤 사건의 책임에 시스템을 아예 무시할 순 없지만 미시 서사를 갑작스레 거대 서사로 치환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당사자성 없는 블랙 코미디가 과연 타당한가, 하는 질문들 역시.

남미의 이문열 : 작가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이미 모임의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 것처럼 꽤 유명한 정치적 인물이었다는 것도 들으며 알게 되었고, 혁중 님이 말씀해주신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사조로 넘어오게 되었다는 이야기, 신자유주의 계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찾다가 「노벨상 바르가스 요사가 좌파? 그는 남미의 '이문열'!」 이라는 프레시안 기사도 찾게 됨.ㅋㅋㅋ 이 기사에 따르면 가르시아 마르께스와 주먹다짐을 하기도 하였다고...ㅋㅋ

☞ 더 읽기 : 일그러진 웃음,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H 님의 브런치)

『조선소』, 후안 카를로스 오네티

※ 책 정보 : 『조선소』, 후안 카를로스 오네티(조구호 역, 문학과지성사)

여러 해 전 카프카의 『실종자』(또는 『아메리카』)를 다시 읽으며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문장을 발견하게 된다.

"당신은 무엇을 보려고 합니까?"

ㅡ『실종자』, 프란츠 카프카(한석종 옮김, 솔출판사)

상황과 제 의지가 아닌 것들에 휘말리거나 휘둘리는 카프카의 소설들 속에 드물게 의지를 감지하도록 하는 강렬한 문장.

생애 첫 우루과이 소설에서 약간의 카프카적 스산함을 느끼게 되었는데, 후안 까를로스 오네티의 『조선소』에서도 약간은 비슷한 문장을 보게 된다.

"총지배인님은 여기서 뭘 기다리시는데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총지배인님이 원하시는 건 전혀 이루어지지 않잖아요. 제겐 그렇게 보여요."

ㅡ『조선소』, 후안 카를로스 오네티(조구호 옮김, 문학과지성사)

〈조선소〉라는 공간, 주인공 라르센이 몇 년 만에 귀환하여 무언가를 해 보고자 시도하는 장소, 그러나 한 번 땡겨보려 계획하던 그 공간은 허울마저 사라진, 그러나 그 허울의 흔적들을, 그 무대의 모든 이들이 허울인 줄 알면서도 계속 존재하는 양 믿고 있는 '척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알면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장소, 그리고 빠져나가려는 순간 모든 것이 허물어지기에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강력한 허울의 고리.

페트루스는 여러 해 전부터 게임의 성과는 믿지 않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게임을, 합의된 거짓말을, 망각을, 맹렬하게, 즐겁게 믿을 것이다.

ㅡ『조선소』, 후안 카를로스 오네티(조구호 옮김, 문학과지성사)

책은 내내 '게임', '연기'와 같은 단어들을 등장시키며, 서사에서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실제와는 동 떨어진 어떤 것, 집단적으로 믿는 어떠한 허상,이라는 감각을 지속시킨다. 진실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공간과 인물, 그리고 사건들. 하지만 비단, 『조선소』라는 특별한 공간과 그곳의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읽는 내내 느낀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무대이자 이야기의 총체이며, 합의된 믿음의 지속이고, 어느 정도 규정된 행동 양식일 뿐인 연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중요하지 않고 의미 없는 어떤 것이 우리를 깨우고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순간이 도래한다.〉

ㅡ『조선소』, 후안 카를로스 오네티(조구호 옮김, 문학과지성사)

안개가 자욱한 느낌과 황량한 계절감 속에 문득 문득 돌출되는 문장들. 그리고 결말은 지금까지처럼 누군가의 시선으로 보아왔던 흐릿함과 사실은 그것과 다르게 실재하는 것의 선명함이 반복된다.(나름 결말이 반전이라 구체적으로 쓰지는 않겠음)

쉽지는 않았지만 정말 좋았다. 〈보이지 않는 세계들〉에서 함께 읽은 분들도, 남미 세션을 마무리하는 모임에서 이 책을 좋았던 책 중 하나로 꼽으신 분들이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문체가 매력적이고, 무기력하고 덤덤한 분위기가 좋다.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으나 아직 이 책이 유일한 번역으로 보인다.

이번 후기는 개인의 감상으로 썼지만 사실은 함께 모임에서 이야기 나눈 것들이 많이 녹아 있으리라 생각한다. 여덟 번의 모임이 사실 짧지 않았고, 읽었던 책들의 편차가 있는 편인데다, 낯선 면들이 꽤 있었음에도 모임을 함께 만들어 가 주신 분들께 큰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혼자 읽었다면 영영 만나지 못했을 책들과 또 혼자였다면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부분 부분을 함께 나누며 퍼즐 조각을 맞춰 나간 기분이다.

여덟 권의 책이, 읽는 입장에선 적지 않았지만 동시에 남미라는 시공간을 이해하기에는 짧은 여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시작은 환상성을 기대하였으나 아시아 문학에 이어 느끼기를, 세계의 구획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도 대륙과 나라, 그것을 넘어선 개인에 기입된 시공간의 세계란 또 얼마나 커다란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함께 해 본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내내 보이지 않는 세계들을 더듬거리며 나름의 세계관과 무대의 이미지와 세계의 총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아직 한 번의 오프라인 모임이 남았지만 2주나 늦은 『조선소』 후기를 통해 남미 문학 세션을 되돌아보았다. 다음 세션은 아마도 조금 중장기 방학을 거쳐 봄 쯤에 중동 문학을 읽게 될 것 같다.

☞ 더 읽기 : 쇠락해가는 개미지옥 속에 뛰어들기, 『조선소』(H 님의 브런치)


중동 문학

2024. 01. 07 ~ 2024. 04. 21

낯선 길로의 발걸음은 언제나 그렇듯이 기대가 반, 걱정이 또 반이다. 호기롭게 시작하였으나 긴 휴식을 거쳐 1년 만에 보이지 않는 세계들 세 번째 세션인 중동 문학편을 시작하려는 마음 또한 첫 문장에 쓴 마음과 꼭 같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읽을 적, 동양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려다 뜻밖의 동양이 심지어는 동북아시아도 아니란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사이드가 말하는 '만들어진 동양'의 시선으로 중동을 바라보고 있는 스스로의 시야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현 시점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 누군들 '국제 감각'과 나고 자란 곳에서의 정체성의 혼재가 없겠느냐마는, 혼재된 중에서도 세계를 인식하는 시선은 과연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일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우리는 '중동'이라 불리는 이들의 말을 들어본 일이 있기나 할까? 대체 과거의 '동양' 그러니까 즉, '중동'이란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이르는 것이며, 여기에 사는 이들은 누구일까. 늘상 〈보이지 않는 세계들〉의 고민이 그러했듯이 아무래도 우린 여기서부터 또 출발하여 다시금 이 질문에 도달할 것이다.

매 세션을 준비할 때마다 느꼈지만 책을 선정하는 것부터 어려웠다. 어떤 책을 고르느냐가 결국에는 우리가 또한 중동에 가질 이미지를 구체화시키거나 기존에 가졌던 이미지를 더욱 강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한정적으로 좁혀야 하는 종수 또한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채로 있는 것보다는 역시 나아가 보는 게 늘 답이었다. 우리는 모임의 시작과 끝에서 같은 질문을 해 왔고 앞으로도 할 테지만 단지 제자리를 맴도는 것이 아닌, 나선형으로 뻗어나가는 대답을 떠올릴 수 있다고 믿는다. 뭉쳐진 채로 다가오는 세계이지만 또 그 각자의 목소리로 와해되어 재구성되는 보이지 않는 세계들.

모임의 시작은 튀르키예로 시작하여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동'의 나라들을 거쳐 아프리카와의 경계에 있는 알제리로 이어질 예정이다.(H 님 픽!) 아직 한참 이른 말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다음 세션으로는 아프리카 문학을 걷게 되지 싶다.

그러나 이렇게 한 걸음, 오래 걸리더라도 지구 한 바퀴 도는, 세계들로의 여행을 옮겨 보려고 한다.

▷ 함께 한 분들 : 기역 님, 대욱 님, 바다 님, 소희 님, 수피 님, 아카

☞ 더 읽기 : 중동문학 읽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H 님의 브런치)

☞ 더 읽기 : 보이지 않는 세계들 - 중동 문학 세션(H 님의 브런치)

중동 문학 읽기의 시작, 『아랍 단편소설선』

※ 책 정보 : 『아랍 단편소설선』, 살와 바크르 외(조애리 외 역, 글누림)

장소란, 본래의 물리적 공간,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과 기록된 역사, 사회적으로 구획된 이미지, 그리고 각각의 사람들의 개인적 기억의 총화이다. 그리고 중동은, 이슈화된 특정 지역과 단 몇 차례 그곳의 사람들과 마주한 경험 이외에 그 자체로 구멍이 뚫린 암전의 공간이라는 것을, 이번 『아랍 단편소설선』을 읽으며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이를테면, 작품 중간 중간 어떤 고유 명사에 대하여 그것이 지역명인지 인명인지 가늠할 수 없을 즈음, 지도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그 고유 명사, 즉 차드는 나라 이름이었던 것이다. 지난 아시아 문학과 남미 문학을 읽을 때보다 더더욱이 보이지 않는 세계들.

그런데다 모임의 첫 책, 『아랍 단편소설선』의 만듦새는 더 커다란 미궁에 빠지게 하였으니.. 픽셀이 깨져 있는 도비라 이미지들과.. 편집과 퇴고를 거치지 않은 듯한 교정 교열과 비문과 중역은 계속해서 무지와 결합하여 시험에 들게 하였다…

그러나 이런 책을 출간한다는 것은 그자체로 굉장한 의의이고, 또 영미/유럽/일본을 제외하여 퉁쳐지는 세계의 소설 판에 '아랍'은 얼마나 소외의 지역일 것이며, 그렇기에 인력은 얼마나 부족할까를 생각하면 영 납득 못할 바는 아니었다. 동아시아권이 아닌 아시아 국가 문학을 읽을 적만 해도 얼마나 역자와 편집자가 한정적일까 싶은데 중동권도 마찬가지 아니겠나.(그럼에도 글누림 출판사는 여러 지역이 문학을 출간해왔고 몇 해 전부터 소명출판에서 출간 중인 계간지 〈지구적 세계문학〉을 창간하여 수 해를 출간해 왔던 출판사다.) 하여 출간사와 역자 후기는 사뭇 감동을 일으키는 동시에 다시금 ‘아랍은 하나의 관념의 덩어리가 아니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역동적인 실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읽은 작품은 물론, 각각의 저자들에 대한 정보, 작품의 배경 등에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정보와 중역이란 한 단계를 더 거친 과정으로 인하여 읽어내는 것은 마치 몇 겹으로 덧씌워진 촉감 아래로 그 형태를 조악하게나마 짚어보는 것에 불과할 것이며, 수피 님 말씀처럼 이런 접근이 이 지역에 가지고 있는 편견을 타파하기는커녕 외려 강화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내내 함께 한 것도 사실이다. 바다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는 뭉뚱그려 아랍/중동이라 일컫는 지역도 그 하나 하나 저마다의 다름이 있을 것이고, 기역 님께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런저런 서구의 나라들 탓으로 국경선이 수직으로 구획되어 있을지언정 각 지역의 스펙트럼과 국경으로도 분리될 수 없는 지역적 세계관이 있을 것이다. 동시에 아카 님께서 던지셨던 질문과 같이 공감하게 되는 면면과 감정들도 상당했다. 더불어 대욱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이곳의 문학들을 단지 멀찍이서 평가하듯 바라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직접 목격할 수 없지만 어딘가에선 폭력과 생존의 문제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을테니. 비록, 표현들 너머의 진실이 있겠지만 소희 님 말씀처럼 책은 이 모든 총체, 역사와 사회의 인식, 그리고 그 외의 미시사와 일상을 담으려 한 노력의 결과물이 아닐까 한다.

기억에 남았던 부분들을 홀로 정리하다 보니 리비아 작가 로사 야씬 하싼의 「공기의 수호 여신」이란 작품이 뒤늦게 눈에 띄어 이 작품을 조금 더 덧붙여 보려 한다. 화자는 난민 심사국의 직원이다. 함께 일하는 소위 제 1세계의 직원들과 나누는 대화, 그리고 난민 심사국에서 일어나는 심사 등에 대한 짤막한 소설이다. 프랑스인 직원과의 대화에서 프랑스인은, 중동에서 일어난 곳곳의 전쟁에 의사로 자원한 아버지가 '아이러니하게도'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로 죽었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화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난 그때 그게 왜 아이러니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노인의 인생이 아이러니가 아니라 비극이 되려면 폭탄이나 미사일에 맞아서 죽어야 하나?

– 『아랍 단편소설선』, 살와 바크르 외 (조애리 외 역, 글누림)

라고. 의료가 널리 보급된 세계에서 이는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겠으나, 전쟁과 기아가 매 초 일어나 난민이 급증하는 나라에서 과연 이것은 아이러니일까. 어딘가에선 어느 하나가 좀더 선행하고 좀더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성과 현재성을 띈 같은 비극일 수도 있다는 것. 이 대화 자체가 어떤 인식과 세계의 다름을 다시 상기시킨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역시 그러한데, 난민 신청장의 경우 육체적 증상과 심리적 상처 모두를 기록하지만 육체적인 증거 없이 정신적 문제만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난민으로 받아들여질 승산이 거의 없다고. 어쩐지 이 소설은 중동의 현재적 상황과 서구적 인식 속 당연함의 충돌을 마주하게 하는 것 같다.

이 외에도 구획과 그로 인해 서로를 구분짓고 차별하게 된 이야기, 우리의 일상과 헤게모니와는 조금 다른 인식의 중심에 있는 종교, 만연한 폭력과 생존, 어쩌면 우리와 같고, 또 다른 세계들에 대한 이야기는 역자 후기를 빌자면 비공식적 역사인 동시에, 부조리한 현실을 초월해 대안을 구축하는 공간일테다. 비록 우리는 사실보다는 어느 정도 굳어져 버린 인식을, 실제보다는 너머를 빌어 보고 있을테지만, 함께 읽음으로 인해 다채롭고 다층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듯하다.

다음 책은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이다. 아시아에서 중동을 향한 길목 같은 느낌의 튀르키예, 나로서는 튀르키예 작품도 파묵의 작품도 처음이라 기대가 된다.

☞ 더 읽기 : 오리엔탈들의 오리엔탈리즘, 『아랍 단편소설선』(H 님의 브런치)

삶이라는 아이러니,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

※ 책 정보 : 『새로운 인생』, 오르한 파묵(이난아 역, 민음사)

소설은 노발리스의 '같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다른 이들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 못했다.' 라는 제사로 시작한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 『새로운 인생』, 오르한 파묵(이난아 역, 민음사)

모름지기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 쯤 겪어 봤을 것 같은 첫 문장은, 대체 어떤 책이기에, 하는 물음으로 시선을 잡아 끈다. 몽유병 같고 침침한 안개 속을 걷는 듯한, 이 명료하지 않고 불분명한 책의 후반부까지 도달했다면, 누군가의 삶을 바꾸어놓거나 위험한 책으로 여겨지는 논란의 책에 대한 호기심도 하나의 동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고로, 결코 하나로 수렴하지 않을 줄거리를 옮기기 보다는 (어쩌면 오독이었을 이해의)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보려고 한다.

항상 경계에 있는 듯한 느낌, 비단 새벽에 읽은 탓일까. 주인공 오스만은 이 책으로 인해 삶이 바뀌어 근원에 이르고자 온갖 방황을 시작하는데 이런 오스만의 행보는 독자의 방황으로도 이어진다. 종잡을 수 없고 언제까지 이어질 지 끝을 알 수 없는 야간 버스 여행과 사뭇 전도된 감정으로 점철된 시선, 그리고 소설 속 이야기들은 어디까지가 경험이며 어디까지가 상상인가 하는 문장들과 묘사된 풍광들이 전부 경계없이 혼재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밤과 아침, 죽음과 삶, 근원과 출구의 경계에 서성이며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오스만.

그런가 하면, 나린 박사는 밀려드는 서구의 문명에 대항하여 전통성을 보존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는 책, 특히 인쇄술에 의해 발행된 책에도, 천편일률적으로 생산되어 시장을 장악해 들어가는 생산품에도 반감을 가지고, 무엇보다 고유의 특징을 간직한 물건들과 그 물건들이 지닌 시간성, 그리고 "기억"을 지키려고 한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과거에는 모든 사물들은 고유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인쇄술로 인해 단어들이 무차별적으로 양산된 이후로는 모든 것이 섞여 버려 혼란에 빠졌다는 것이다. 해서 사람들은 이 혼란에서 길을 잃는 것이라고.

나린 박사의 이러한 말을 들은 오스만은, 그의 다른 길이자, 자신이었을 무엇인가인, 한때 니히트였고, 메흐메트였고, 또 지금은 오스만인, 나린 박사의 아들을 찾아 나선다. 오스만을 책으로 이끈 것도 그였지만, 삶에서 그 책의 영향을 받았는데도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나린 박사의 아들과의 대화에서 그에게 끔찍한 질투를 느낀다. 불완전함 속에서 근원을 찾아 헤매는 오스만과는 다르게 그는 거의 잊혀진 곳에서 평화롭게, 필사 일을 하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 일에 대해 단순히 책을 베껴 쓰는 일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몰라. 그러나 내 일은 단순한 복사를 넘어선 것이야. 나는 느끼면서, 이해하면서, 매번 모든 문장, 모든 단어, 모든 철자들이 나의 발명품인 것처럼 써.

– 『새로운 인생』, 오르한 파묵(이난아 역, 민음사)

라고 하는 그의 말을 뒤로 하고 오스만은 기차를 움직이는 사람(기관사)과 영사기를 돌리는 사람(영사기사)이 프랑스에서 들어온 외래어 makinist라고 똑같이 불리는지를 생각하며 돌아온다. '근원', '진실'에 도달하려 긴 시간의 방황을 한 오스만에게 주어진 대답이라고는 그것이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 모든 인생이 똑같다는 것이었다.

몇 년의 영혼의 방랑 끝에 그는 일상을 살아 나가게 되고, 다시 몇 권의 책으로 손을 뻗지만, 이제 가정도, 자식도, 직장도, 일상도 생긴 그에게 책은, 근원을 찾아 나서는 통로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월함을 느끼려는 자위도 아닌, 그저 좋아하기에 가볍게 뒤적이는 정도의 것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그는 청년 시절 그 문제의 책과 관련된 과거의 기억을 발견하게 된다. 책과 기억은 계속해서 서로 순환하여 결국은 어린 시절의 기억, '새로운 인생'이란 상표의 캐러멜로 이어지는데……..

이렇게 캐러멜을 계기로, 서구에 잠식되어 이제는 더이상 팔지 않는 캐러멜에 그려졌던 그림의 의미를 찾으러 순간 오스만은 다시 여행 길에 우발적으로 접어 들게 된다. 그 길은 자취를 감춰버린 캐러멜처럼, 전통이라곤 사라진 거리들이었고, 캐러멜을 만든 이인 슈레이야 씨가 꺼낸 '샤흐마트'(왕의 죽)라는 말처럼 왕의 죽음을 목도하는 그러한 길이었다. 그러나, 마치 빼앗겨버릴고 사라져버린 모든 영광의 기억의 집약인 것 같은 '새로운 인생'이라는 캐러멜을 만든 슈레이야 씨의 노년은 전혀 허망하거나 잊혀진 패배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수많은 캐러멜들이 누군가의 주머니 속에서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누렸기 때문이라고. 비록, 오스만은 캐러멜의 그림의 의미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되려 가벼운 마음으로, 목적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삶의 순간을 음미한다.

일상을 몇 해나 살고 있었지만 일상에, 자신의 삶에, 부재했던 오스만은 이로써 어쩌면 진정으로 자신의 삶 속에 이입할 기회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 돌아가는 길, 진심으로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딸과 무엇을 하며 놀아줄 지를 생각하며 삶에 소소한 기대를 하는 순간, 어느덧 순환하던 시간은 종착역에 이른다. 젊은 시절, 부질 없는 삶에서 유일하게 의미로 여겨졌던 바로 그것, 늘상 추구해 왔지만 좀처럼 오지 않던 새로운 세계, 곧 죽음이, 그가 그것을 결코 원치 않게 된 순간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대체 영원히 삶을 가로지르고야 말았던 저 책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었고 책의 자기 지시성 역시 생각해 볼 일이다. 읽으면서도, 글을 쓰기 전에도, 쓰면서도 내내 곤란했다. 대체 무어라 해야 할까. 그러나 니히트였고 메흐메트였고 오스만이었을지 모를, 그의 말처럼, 나름대로의 이해(오해)하게 되었지만, 그것을 설명할 순 없을 것 같다. 역시나 직접 읽어보는 수밖에 없을, 겪어보는 수밖에 없을, 그러한 삶과 같다. 하지만 언어로 굳이 표현하자면 삶은, 거대한 목표, 허망한 주장과 텅 빈 기호로 가득 찬 대의명분, 대량으로 양산되어 눈 앞을 가리는 시대적 요구 같은 것들 보다는 굉장히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리라. 누군가의 주머니 속 캐러멜, 자녀와의 놀이, 글자 하나에 담긴 사소한 의미, 일상의 거리 들처럼.

북클럽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잔상처럼 남았던 책에 대해 보다 다방향으로 구체적으로 생각할 계기가 되었는데 기역 님께서 알아보아 주신 내용처럼 수피즘을 캐리커처화하여 현란한 문장과 대비되게 하는 측면으로도 읽힐 수 있을 것 같고, 아카 님 말씀과 같이 인생에서 너무나 의미를 찾는 것에 대해 오히려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공감이 되었다. 잔잔한 어조에 비해 다이나믹한(?) 전개, 그리고 시작점이었던 것에 꼬리를 무는 머리, 순환하고 이어지고 맺어지는 이상한 꼬임과 같은 소설이라고 해주신 소희 님의 말씀처럼 꼭 그렇게 읽히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튀르키예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의 동상 이야기도 종종 나왔는데 아카 님과 바다 님께서 해 주신 튀르키예 사회를 개혁했던 아타튀르크에 대한 이야기도 튀르키예 근대화 초기 사회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해주었다. 바다 님께서 지적하신, 버스 회사의 모순적 작명에 대한 이야기도 재밌었고, 또 의미를 너무 찾다가 오스만과 같은 스스로의 모습을 보시고 허망해지는 기역 님의 말씀도 기억에 남는다. 더불어 많은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 의미를 탐구하는 사람들 중, 비록 같은 결론을 얻을지라도 자신의 방식으로 겪어 본 경험들이 주는 울림에 대한 대욱 님 말씀도 공감되었다.

전반적으로 힘든 책이었는데, 또 그만큼 크게 기억에 남을 책으로 남을 것 같다. 문장도 유려하고 아름다웠다. 파묵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어진다.

☞ 더 읽기 : 새로움의 광휘도 저물어 가네, 『새로운 인생』(H 님의 브런치)

『나의 몫』, 파리누쉬 사니이

※ 책 정보 : 『나의 몫』, 파리누쉬 사니이(허지은 역, 북레시피)

☞ 더 읽기 : 이란 혁명 전후의 삶 통과하기, 『나의 몫』(H 님의 브런치)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아흐메드 사다위

※ 책 정보 :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아흐메드 사다위(조영학 역, 더봄)

『야쿠비얀 빌딩』, 알라 알아스와니

※ 책 정보 : 『야쿠비얀 빌딩』, 알라 알아스와니(김능우 역, 을유문화사)

『프랑스어의 실종』, 아시아 제바르

※ 책 정보 : 『프랑스어의 실종』, 아시아 제바르(장진영 역, 을유문화사)

자유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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